김양식 충북연구원 수석연구위원, 충북 3·1운동 100주년 기념 학술토론회서 주장
  • ▲ 김양식 충북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이 28일 충북도청 대회의실에서 열린 3·1운동 100주년 기념학술토론회에서 주제 발표를 하고 있다.ⓒ박근주 기자
    ▲ 김양식 충북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이 28일 충북도청 대회의실에서 열린 3·1운동 100주년 기념학술토론회에서 주제 발표를 하고 있다.ⓒ박근주 기자

    “충북의 3·1운동은 민초들의 평등과 자유의지를 각성시키고, 새로운 미래를 이끌어 갈 청년층을 길러낸 계기가 됐다.”

    김양식 충북발전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28일 충북도와 ‘충북3.1운동·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 범도민위원회’가 충북도청 대회의실에서 연 ‘종합학술대회’에서 이같이 평가했다.

    ‘100년의 함성을 이어받아 강호대륙’으로 라는 주제로 열린 이번 학술대회에서 김 수석연구위원은 ‘충북 3·1운동, 그 기억과 기념’이란 주제 발표에서 이 같은 평가의 바탕에 충북에서의 3·1운동이 주요 여섯 가지 특징으로 분류했다.

    김 수석연구위원은 “충북의 3·1운동은 △격렬하고 △봉화만세형이고 △동학혁명이 사회 변혁과 민족운동으로 모아졌으며 △한말 의병이 주도했고 △젊은 청년이 역사 무대로 크게 등장하는 계기가 됐다”고 분석했다.

    김 위원은 “일제의 조선군참모부가 충청지방을 경기지방 다음으로 위험지역으로 간주했다. ‘조선소요사건경과개람표’에서 충북지역에서 전개된 27회의 만세시위 가운데 무려 70.4%인 19회에서 일제와 직접 충돌한 것으로 나타났고, 시위대에 의해 경찰관서 13개소, 헌병대 5개소, 군청과 면사무소 7개소, 우편소 1곳 등 26개소가 습격당해 파괴됐다”며 자료를 제시했다.

    또한, “1919년 3월 30일과 4월 1일 괴산 청안시위때 일제의 발포로 10명이 순국했고, 4월 1일 음성의 한내 시위 때에는 충주수비대의 발포로 임산부 등 12명이 순국하고, 40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며 “축소된 조선총독부 통계에 의하면 출동병력이 90명이었고, 11개소에 출동해 9회에 발포해 시위군중 57명이 사망하거나 부상을 당했고, 일제 군경도 11명이 사상자가 났다”고 강조했다.

    봉화만세의 특징으로는 “청주 강내면 횃불시위를 주도한 조동식의 ‘봉화고변’의 전통을 참작해 3월 23일부터 사흘간 봉화만세운동이 일었다. 23일 밤 9시경 청주군 강서와 강내 지역은 물론 옥산, 강외, 남이면 일대까지 동참했고, 이를 계기로 횃불 독립만세시위가 파급됐다”며 “충북지역 84회의 시중 가운데 18회(21.4%)가 횃불시위였다”고 분석했다.

    동학혁명과의 연계성 측면에서 “동학농민혁명 이후 사회 변혁과 민족운동에 참여한 이들의 변혁과 저항 흐름이 3·1운동으로 모아졌다”며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6인이 충북출신이고, 청주지역 만세운동을 주도한 집단은 동학의 전통을 잇는 천도교계였다. 청주와 진천 만세 시위에 천도교인이 많이 참여했다”고 설명했다.

    한말의병장들의 만세시위 주도와 관련해서는 “한봉수 의병장이 내수 세교장터에서 4월 1,2일 만세 시위를 주도했고, 진천에서는 대한제국 군인 출신으로 의병활동 경험이 있는 윤병한이 4월 2일 광혜원 만세시위를, 영동에서는 이강년 의진 출신인 양봉식이 4월 3일 영동 학산면 서산장날 만세 시위를 이끌었다”고 밝혔다.

    김 수석연구위원은 “이는 동학농민혁명 이후 충북지역에서 전개된 평등과 자유를 지향하는 변혁적 흐름과 민족적 저항이 3·1운동으로 수렴돼 크게 폭발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특히, 김 수석연구위원은 “3·1운동이 젊은 층이 역사 무대로 크게 등장하도록 했다”는 점을 주목시켰다.

    그는 “충북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일제에 체포된 139명의 직업별 분포는 농업(74%), 학생 10명(7.2%) 등이며 연령별로는 20대가 61명(44%), 30대가 41명(29%), 40대가 19명(13.7%), 10대가 11명(8%) 순이었다. 충북의 만세운동은 주로 20~30대의 젊은 청년 농민층이 주도했는데, 이는 새로운 사회 변화세력의 등장을 의미하고, 이후 1920년대 청주 괴산 영동 등지에서 청년회가 조직돼 신간회 운동이 주도되거나 농민 노동운동과 같은 대중 운동이 전개됐다”고 덧붙였다.

    김 수석연구위원은 “3·1운동은 청년층의 주체적 자각과 사회적 실천을 통해 이후 사회 발전에 필요한 혁신세력이 성장하는 계기가 됐다”며 “이들 가운데 △국내 항일운동에는 신흥구·신형식·한병호·홍일창·박무병이 △문화운동에는 서상경·이상직이 △중국방면 항일운동에는 이우민·류자명·유석현이 △만주방면 항일 독립운동에는 남상렬·안후선·정주해가 △임시정부에는 황학수·곽중규·홍진 등이 참여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