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부족 논쟁 넘어 지역 의료자원 연계해야…고령화·지방소멸 시대 새로운 해법경로당부터 보건소·119·응급의료까지 묶고 AI로 연결…‘농촌형 통합의료안전망’ 제안
  • ▲ ⓒ건양대 임용표 교수
    ▲ ⓒ건양대 임용표 교수
    의사 수를 둘러싼 논쟁이 계속되는 사이 농촌의 의료 공백은 더 선명해지고 있고, 도시에는 병원과 의사가 몰려 있지만 농촌에서는 가까운 진료기관을 찾는 것부터 쉽지 않다. 

    특히 고령 주민의 만성질환 관리와 농작업 중증외상, 응급환자 이송 문제는 단순한 의사 수 증원만으로 해결하기 어렵다. 농촌 의료의 핵심은 ‘의사가 몇 명 더 필요한가’가 아니라 ‘필요한 의료가 필요한 주민에게 얼마나 빨리 연결되는가’에 있다.

    이미 지역 곳곳에 흩어진 보건·의료·복지·응급자원을 하나의 안전망으로 묶는 정책 전환이 시급하다.

    농촌 의료의 위기는 ‘부족’보다 ‘단절’에 있다

    농촌의 고령화는 도시보다 빠르게 진행되고 있고, 고혈압과 당뇨, 심혈관질환 등 만성질환 관리가 필요한 주민이 많고, 장기간 농작업에 따른 근골격계 질환도 흔하다. 농기계 사고와 낙상, 골절, 절단 등 중증외상 위험까지 안고 있다.

    하지만 농촌에서는 외과와 응급실을 비롯해 산부인과와 소아과 등 필수의료 접근성이 갈수록 낮아지고 있다. 아플 때 갈 곳이 마땅치 않고, 위급할수록 이동거리와 시간이 생명을 좌우한다.

    그렇다고 모든 군·면에 종합병원을 세우고 모든 전문 과목을 갖추는 방식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의료수요가 적은 지역에서 민간병원에 응급실과 전문진료를 상시 유지하도록 요구하는 데도 한계가 있다.

    따라서 정책의 질문을 바꿔야 한다.

    ‘농촌에 병원을 얼마나 더 지을 것인가’가 아니라 ‘현재 존재하는 의료자원을 어떻게 하나의 체계로 연결할 것인가’이다.

    물론 연결이 의료인력 부족을 대신할 수는 없다. 지역에서 일할 의사와 간호인력 등 필수 의료인력을 확보하는 정책은 반드시 병행돼야 한다. 다만 한정된 자원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연결망 역시 동시에 구축해야 한다.

    50여 년 전 미쓰기의 교훈…시설보다 시스템이었다

    일본 히로시마현의 작은 농촌마을 미쓰기(御調)는 이 문제에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1970년대 미쓰기에서는 미쓰기병원을 중심으로 지방정부와 보건·복지 인력을 연계해 의료와 예방, 복지, 재택서비스를 하나의 지역체계로 묶기 시작했다. 조직별로 분리된 서비스를 주민의 삶을 중심으로 연결하면서 지역포괄케어의 발전에도 영향을 미쳤다.

    한국의 행정과 의료구조가 다른 만큼 이 모델을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 그러나 ‘기관의 벽보다 주민의 삶을 우선한다’는 원칙은 충분히 참고할 만하다.

    우리 농촌에도 이미 자원이 있다. 보건소와 보건지소, 보건진료소, 119 구급체계, 지역병원, 권역응급의료센터와 중증외상센터, 닥터헬기 등이 운영되고 있다.

    생활 기반도 마찬가지다. 경로당과 마을회관, 주민센터, 교육·문화시설 등 주민이 실제로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이 지역 곳곳에 있다.

    그런데도 의료·복지·응급체계가 각각 움직이면 주민 입장에서는 ‘없는 서비스’와 다르지 않다.

    농촌에 필요한 것은 시설 하나를 더 추가하는 정책보다 흩어진 자원을 실제로 작동하는 하나의 체계로 만드는 정책이다.

    경로당을 ‘마을 건강 플랫폼’으로

    특히 경로당과 마을회관을 생활권 의료·복지의 거점으로 재설계할 필요가 있다.

    이 공간은 이미 주민의 일상 속에 들어와 있다. 고령 주민만의 공간에 머물지 않고 청년농과 귀농·귀촌인까지 함께 이용하는 세대통합형 생활거점으로 확장할 수 있다.

    건강상담과 혈압·혈당 등 기본 건강관리, 운동과 식생활 교육, 복지상담, 문화활동을 한 공간에서 연계하고 이상 징후가 발견되면 보건진료소나 의료기관으로 즉시 연결하는 방식이다.

    핵심은 ‘환자가 의료기관을 찾아가는 체계’에서 ‘의료와 복지가 주민의 생활공간으로 찾아가는 체계’로 바꾸는 것​이다.

    AI는 의사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연결’을 고도화해야

    AI와 디지털 기술은 이 같은 전환을 현실화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AI가 의사를 대신해 진료하는 것이 아니라, 주민의 건강정보 변화를 분석해 위험신호를 조기에 파악하고 필요한 의료서비스를 연결하는 역할을 맡는 것이다.

    응급상황에서는 환자의 위치와 상태, 의료기관의 수용능력, 이동시간, 이송수단 등을 종합해 119와 의료진이 가장 적절한 이송·치료 경로를 선택하도록 지원할 수 있다.

    결국 AI의 역할은 의료의 대체가 아니라 의료자원의 최적 연결이다.

    이를 보건·의료에만 한정하지 않고 건강관리, 복지, 운동, 식생활, 교육, 문화까지 연계한다면 농촌 주민의 일상 전체를 지원하는 생활안전망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

    나는 이를 ‘농촌형 통합의료안전망(Rural Integrated Medical Safety Network·RIMSN)’​으로 제안한다.

    마을 생활거점에서 보건진료소와 보건지소, 지역병원, 119, 권역응급의료센터, 중증외상센터, 닥터헬기까지 연결하는 구조다.

    평상시에는 예방과 건강관리를 하고, 질병이 발생하면 적절한 진료로 연결하며, 사고가 나면 가장 적합한 의료기관으로 신속하게 이송하는 체계다.

    진짜 장벽은 ‘기술’이 아니라 ‘부처의 칸막이’

    문제는 기술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농촌개발은 농림축산식품부, 의료·복지는 보건복지부, 응급구조는 소방당국, 지방행정은 지방자치단체 등으로 나뉘어 있다.

    주민의 삶은 하나인데 행정은 여러 개로 쪼개져 있다.

    좋은 사업과 예산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각 부처의 정책이 서로 다른 목표와 방식으로 추진되면서 주민에게 도달하는 과정에서 단절이 발생한다.

    이제 정책 평가의 기준도 바뀌어야 한다.

    ‘무엇을 새로 만들었는가’보다 ‘기존 자원을 얼마나 잘 연결해 주민의 삶을 개선했는가’를 봐야 한다.

    범정부적 조정도 필요하다.

    국무조정실을 중심으로 농식품부·복지부·소방청·행정안전부와 지방자치단체가 공동 목표를 세우고 관련 사업과 예산을 연계하는 방식이다.

    우선 몇 개 농촌지역을 시범지역으로 선정해 부처별 사업을 묶고 RIMSN을 구축한 뒤 성과를 검증해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할 수 있다.

    AI와 디지털 플랫폼 역시 부처별로 따로 구축하기보다 개인정보 보호와 보안을 전제로 필요한 정보를 안전하게 연계할 수 있는 공동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지방소멸 시대, 농촌을 의료혁신의 출발점으로

    농촌은 의료서비스가 부족한 곳이지만 동시에 새로운 의료체계를 가장 절실하게 실험할 수 있는 곳이다.

    50여 년 전 미쓰기가 보여준 것도 거대한 병원이 아니었다. 지역에 이미 존재하는 자원을 연결하고 주민의 삶을 중심에 놓는 발상의 전환이었다.

    우리에게도 출발점은 충분하다. 경로당과 마을회관, 보건진료소와 119, 지역병원과 응급의료체계, 닥터헬기, 그리고 세계적 수준의 정보통신기술과 AI가 있다.

    없는 것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것이다.

    이제 농촌 의료정책도 ‘더 짓고, 더 늘리는 방식’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이미 있는 자원을 촘촘히 연결해 ‘필요한 순간 작동하는 의료체계’​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의료는 병원 안에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주민이 생활하는 마을에서 시작돼야 한다.

    경로당에서 건강을 살피고, 보건진료소가 관리하며, 필요할 때 지역병원과 연결하고, 응급상황에서는 119와 전문의료체계가 즉시 움직이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AI는 그 사이를 연결하고 최적화하는 역할을 맡을 수 있다.

    이제 농촌을 의료의 변방으로 남겨둘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의료혁신의 출발점으로 만들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농촌 의료의 미래는 병원 숫자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흩어진 자원을 얼마나 촘촘하게 연결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것이 지방 소멸 시대, 농촌에서도 세대와 관계없이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는 ‘친인간 농촌 생활안전망’​의 출발점이다.

    임용표 건양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