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규홍 서원대학교 명예교수
  • ▲ 박규홍 서원대학교 명예교수.ⓒ서원대학교
    ▲ 박규홍 서원대학교 명예교수.ⓒ서원대학교
    # 1. 필자가 현역이었을 때 매주 지방 언론에 기명 칼럼을 실었는데, 2006년 즈음 인터넷에서 떠돌던 다음과 같은 유머를 칼럼에 인용한 적이 있다.

    << 할머니 사오정이 길을 걷고 있는데 뒤에서 어떤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같이 가 처녀∼. 같이 가 처녀∼.” 

    그 소리를 들은 할머니가 처음에는 귀를 의심하다가 자꾸 그렇게 들리니까 “내가 아직도 처녀처럼 보이나? 내 뒷모습이 그렇게 예쁜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떤 남자가 자기를 그렇게 예쁘게 보는지 궁금해서 그 남자를 보고 싶었지만, 그 남자가 실망할까 봐 차마 뒤돌아보지 못했다. 

    집에 돌아온 할머니 사오정이 평소와 달리 싱글벙글하자 손자가 할머니에게 물었다. “할머니, 오늘 무슨 좋은 일 있었어요?” 할머니가 답하기를 “아까 집에 오는데 어떤 남자가 나한테 처녀라고 그러더라.” 

    손자는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으로 “잘못 들은 건 아니고요?”라고 되물었다. 그러자 할머니가 정색하며 “아니다. 내가 분명히 들었다. 분명히 처녀라고 했어”라고 했다. 손자가 “그게 누군데요”라고 물으니 “그건 모르지. 하여튼 남자들은 예쁜 건 알아서….” 라면서 연실 싱글벙글하였다. 

    그래서 손자가 할머니에게 “그럼 할머니 내일 보청기 끼고 그곳에 가서 다시 들어보세요”라고 말했다.

    이튿날 할머니 사오정이 손자의 말대로 보청기를 끼고 집을 나섰다. 어제 그 소리를 다시 듣고 싶기도 했고 그 소리를 한 남자가 무척 보고 싶기도 해서였다. 

    그런데 종일 돌아다녀 봐도 할머니의 귀에는 그 남자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내일 다시 나와야겠다고 생각하고 집에 오는데 뒤에서 어제 들었던 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갈치가 천원∼. 갈치가 천원∼.” >>

    젊고 예쁘고 싶은 여성의 잠재적 본능이 사오정 할머니의 귀를 통하여 “같이 가 처녀∼”로 들렸던 게다. 사오정 할머니처럼 어떤 단어나 문자의 발음이 다른 의미나 언어의 발음으로 들리는 현상을 ‘몬더그린(Mondergreen)현상’ 이라고 한다.
     
    #2. 지금 우리나라는 두 진영으로 갈라져서 사오정 할머니처럼 ‘몬더그린 현상’에 빠져있다. 많은 국민이 ‘몬더그린 신드롬’을 앓고 있는 게다. 

    미국 방문 중에 윤 대통령이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만난 뒤 회의장을 빠져나오면서 수행원들과 나눈 사적 대화에 비속어와 미국을 폄훼하는 듯한 말을 하는 장면이 찍혔다고 하는데, MBC가 이를 “국회에서 이XX 들이 승인 안 해주면 바이든이 쪽팔려서 어떡하나”라는 자막까지 달아서 방송을 내보내면서 소동이 난 게다. 

    MBC는 이런 상황을 미국 정부 당국에 이메일로 견해를 문의했다는데, MBC의 이런 처신은 우리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에게 쌍말을 했다고 동네 아이들처럼 이메일로 고자질하고 동네방네 퍼뜨리는 행태로 밖에 달리 해석이 안 된다. 

    대통령 내외의 해외 순방을 흠집 잡을 기회로 삼았던 야권과 반정부 성향 방송매체가 한 건 잡았다고 해야 할지, 그래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다. 많은 국민이 그 기사를 보고 그냥 기분이 찝찝하고 별로 유쾌하지 않았다. 지금의 국내외 상황이 예사롭지 않은데, 쓸데없는 데서 정치권이 서로 상대 흠집 내면서 누가 못하는지 힘겨루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도 윤 대통령의 해당 발언의 동영상을 여러 번 반복해서 들어봤다. 필자의 청력이 떨어져선지 ‘쪽 팔린다’라는 말 외는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알아들을 수 없었다. 윤 대통령을 지지하는 국민의 귀에는 대통령실 발표처럼 ‘날리면’으로 들리고, 야당이나 반정부 성향의 국민에겐 ‘바이든’으로 들린다고 하니 단군 할배가 강림하시어도 누구 귀가 정확하다고 심판하지 못할 거 같다. 듣고 싶은 대로 듣고, 생각하는 대로 치부해버리는 ‘몬더그린(Mondergreen) 효과’가 작동해서이다. 

    대통령 내외가 해외 순방 출발하기 전부터 야당 측에서 별별 훈수가 다 튀어나왔었다.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장례식 조문에서는 탁 아무개 씨가 장례전문가 호소인으로 나와서 온갖 조문 훈수를 하고 평가하기도 했는데, 이를 두고 진 아무개 평론가는 탁 씨가 한류 장례문화를 영국에 널리 알렸다고 평가했다. 삶은 소 대가리가 하늘 쳐다보고 크게 웃을 일이다. 

    정치권의 이런 갑론을박을 보다 못해 주한 영국대사는 대통령 내외가 직접 여왕 장례식에 참석한 것이 조문이고 영국에 영광이었다고 해명했다. 야당에서 하는 짓거리가 마치 몇백 년 전 조선조 시대에 예송 문제로 죽기 살기로 당쟁하던 것과 다를 바 없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영국 여왕 조문과 미국에서 대통령이 측근과 나눈 사적 발언이 이렇게 죽기 살기로 다툴 만큼 중요한 사항인지는 국민 각자가 판단할 것이다. 

    #3. SNS에서는 윤 대통령의 사적 발언에 대한 보기 거북한 패러디 그림이 많이 돌아다닌다. 조선시대 왕이 입었던 곤룡포를 바바리맨처럼 입은 윤 대통령의 패러디 그림이나 ‘바이든’을 ‘날리면’이라 했대서 신상품 라면으로 패러디하기도 한다. 유치하기 짝이 없다. 

    어떤 사진에는 1톤 트럭 위에 어떤 법사 앞에 윤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가 머리를 조아리는 큰 조형물을 실어서 시내를 돌아다니는 광경이 보인다. 정치판의 여야 다툼이 거세질수록 이런 현상이 더 심해질 것으로 보여서 걱정이다. 정치판이 찌질하고 유치하고 살벌하기까지 하다.

    우리 정치가 영양가 없고 실속 없는 일로 서로 비방만 하는 소모전으로 허송만 할 때인가 한번 생각해보자. 아직도 대통령 선거에 승복하지 않은 듯한 야당의 태도는 납득하기 어렵다. 진 거는 진 거고 앞으로 정치 잘해서 다음 선거에서 야당이 이기면 될 일이다. 그게 민주주의 아닌가. 

    권력은 국민한테서 나오는 거고, 정치인은 국민이 임시 대여해준 권력을 가지고 나라를 이끄는 게다. 그러다 나라를 잘못 이끌면 대여해준 권력을 국민이 뒤도 안 돌아보고 냉정하게 회수해가는 게 민주주의이다. 

    문 정권이 정권 재창출을 하지 못한 것도 문 정권이 나라를 잘못 이끌었다고 국민이 판단했기 때문이다. 야당이 되어서 다시 정치를 잘한다는 믿음을 국민에게 주면 국민은 다시 민주당에게 권력을 대여해줄 것이다. 

    민주당은 지금이 내분으로 자중지란에 빠진 국민의힘을 밀치고 국민의 지지를 받아 다시 권력을 쥘 절호의 찬스이다. 그런데 ‘몬더그린 효과’ 같은 것에 빠져서 찌질하고 쪼잔한 정치판을 벌이고 있다. 굴러들어온 복을 차버리고 있다. 

    명분 없는 외교부 장관 해임건의안을 독단적으로 밀어붙였고, 멀쩡히 일 잘하고 있는 법무부 장관과 행안부 장관 탄핵 카드를 만지작만지작하고 있다. 청년 영끌족을 울리는 부동산 악법을 고쳐야 하는 등 할 일이 태산처럼 밀려있는데 민생 민생 하면서도 실제로는 영양가 하나도 없는 찌질하고 쪼잔한 것에만 몰입하고 있다. 

    지금 대한민국에는 큰 그림의 미래지향적 정치는 하나도 없다. 이전투견(泥田鬪犬)의 정치만 하고 있어서 국민이 혀를 차면서 지켜보고 있다. 정치판이 계속 이렇게 나가면 누군가는 다음 선거에서 국민에게 크게 혼날 거다. 그게 누구이고 어느 쪽일까? 국민은 이미 마음속으로 그들을 선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