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기념관, 4월 한달간 사진 등 9점 전시
  • ▲ 독립운동가 안창호 선생.ⓒ독립기념관
    ▲ 독립운동가 안창호 선생.ⓒ독립기념관
    독립기념관(충남 천안 소재)은 국가보훈처와 공동으로 독립운동가 안창호를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고 공훈을 기리는 전시회를 4월 한 달 간 개최한다.

    28일 독립기념관에 따르면 다음달 1일부터 30일까지 독립기념관 야외기획전시장에서 안창호 사진 등 9점을 전시한다.

    도산(島山) 안창호는 1878년 11월 9일 평안남도 강서군 초리면 칠리 봉상도(일명 도롱섬)에서 안흥국(安興國)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독립기념관에 따르면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하던 안창호는 청일전쟁을 목격하며 큰 충격을 받았고, 서울에서 선교사 밀러를 만나 민노아학당에 입학하게 됐다. 

    신학문을 3년간 수학한 이후 그는 독립협회의 민권운동에 참여하면서 국가가 나아갈 길을 모색하고 국민교육의 중요성을 절감했으며 독립협회 해체 후에는 교육과 전교활동에 전념하며 본격적인 교육학 공부를 결심하게 된다. 

    이어 1902년 이혜련과 혼인한 다음날 부부가 함께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안창호는 한인들의 생활태도와 여건을 개선하고 한인친목회를 결성해 해외에 거주하는 우리 동포들이 단합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리버사이드의 오렌지농장 노동자들에게도 “오렌지 한 개를 따더라도 정성껏 따는 것이 나라를 위하는 일”이라며 한인에 대한 신용을 높이는데 힘썼고, 점차 한인사회의 지도자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1905년 4월에는 동지들과 함께 조국 광복을 사업목표로 한 정치단체인 공립협회를 창립한 안창호는 초대회장으로 한 공립협회는 각지에 지방회를 확대해 나갔고 ‘공립신보’를 통해 국내외 소식을 알리는 등 구국사업을 전개하면서 이후 미주 한인사회를 대표하는 대한인국민회로 발전했다. 

    안창호는 귀국해 대성학교를 설립하고 청년학우회를 조직하는 등 다방면의 민족운동과 함께 항일비밀결사 신민회 활동을 통해 국권회복을 전개했다.

    그러나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 후 국내에서의 독립운동 전개가 어려워지자 1911년 미국으로 돌아와 활로를 모색한 안창호는 먼저 대한인국민회의 조직을 미주 뿐 아니라 시베리아, 연해주, 만주 등지로 확대하는 한편 흥사단을 설립해 독립운동의 조직과 기반을 마련했다.

    안창호는 3·1운동 이후 수립된 상하이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서리 겸 내부총장으로 취임했으며 독립운동세력의 통일을 역설하며 임시정부의 체계를 세우고 임시정부 통합을 이끌었다. 임시정부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독립운동단체의 통합과 이상촌 건설운동에 매진했다. 

    1932년 윤봉길 의거와 관련해 2년 6월 간의 옥고를 치른 안창호는 동우회 사건으로 다시 수감되며 지병 악화로 1938년 3월 10일 순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