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규홍 서원대학교 명예교수.ⓒ서원대학교
    ▲ 박규홍 서원대학교 명예교수.ⓒ서원대학교
    오늘의 칼럼은 수학 이야기로 시작해야겠다. 수학의 ‘집합론’에 ‘부분집합(subset)’과 ‘초집합(超集合, superset, 또는 포함집합, 확대집합이라고도 한다.)’이라는 게 있다. 수학적 정의로 엄밀하게 설명하지 않고 일반적인 설명으로 독자들의 이해를 돕자면 부분집합은 어떤 집합에 포함되는 집합을 일컫는 용어이고, 초집합은 어떤 집합을 포함하는 그보다 큰 집합을 일컫는 용어이다. 

    이를테면 ‘집합 A가 집합 B의 부분집합’이고 ‘집합 B가 집합 C의 부분집합’이라면, ‘집합 C는 집합 B의 초집합’이 되고 ‘집합 B는 집합 A의 초집합’이 된다.  초집합과 부분집합은 의미가 서로 상대적이다.

    칼럼의 모두(冒頭)에서 이렇게 수학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최근에 불거진 ‘환경부 블랙리스트’ 문건 파동으로 정치권에서 오가는 말들을 수학적 개념으로 설명해야 독자들의 이해가 빠를 것이라 생각해서이다. 

    소식에 따르면 ‘환경부 블랙리스트’ 문건이 처음 폭로되었을 때 청와대 대변인은 “아는 바 없다. 문재인 정부에는 민간인 사찰 유전자가 없다”고 말했다. 문재인 정권의 DNA가 생물학적으로 그렇게 무결하니 블랙리스트 문건 따위는 나올 리 없다는 매우 과학논리적인 용어로 ‘블랙리스트’에 대하여 무관하다고 딱 잡아 뗀 게다. 자기들 잣대로 그렇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전 정권 때 보임된 산하단체 임원들에게 사퇴를 종용하다가 거부하면 ‘무기한 감사’ 와 ‘고발 조치’를 획책했고 이를 장관까지 보고한 정황증거가 환경부에서 나오니까 청와대 대변인은 “수사를 지켜보자.”고 말했다. 

    그러다가 해당 임원의 진술에서 청와대 개입 단서가 나오자 하루꼬박 뜸을 들인 후에  청와대 대변인은 “그 문건은 블랙리스트가 아니라 체크리스트이다”라고 답변했다. 기발하게 단어를 바꾼 게다.

    청와대 대변인의 ‘체크리스트’ 발언을 보면서 그 단어를 절묘하게 뽑아낸 청와대 인재들의 재치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대변인의 발언이 거짓말이라고 야당이 방방 튀고 시중의 여론이 들끓지만, 수학적 관점으로 보면 청와대 대변인의 발언을 완전히 거짓말이라고는 볼 수 없다는 게 필자의 견해이다. 팩트에 상관없이 그냥 뭉개고 퉁치고 넘기려다 보니 그런 발언으로 변명할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을 게다.

    청와대 대변인의 ‘블랙리스트가 아니고 체크리스트이다’라는 발언이 틀리지 않다는 이유를 설명하면 이렇다. ‘블랙리스트’는 ‘체크리스트’의 한 부분이다. ‘화이트리스트’도 ‘체크리스트’의 한 부분이다. ‘체크리스트’에는 ‘블랙리스트’와 ‘화이트리스트’ 모두 포함된다. 그러므로 ‘체크리스트’는 ‘블랙리스트의 초집합이 된다. 청와대 대변인의 말을 수학적 관점으로 보면 블랙리스트를 체크리스트로 범위를 넓혀서 말한 거니까 틀리진 않다는 게다. 

    결과적으로 청와대 참모진이 뜸 들여서 짜낸 단어 ‘체크리스트’가 틀린 말이 아니므로 ‘환경부 블랙리스트’를 청와대가 절반을 인정한 거로 볼 수 있다. 머리를 써서 짜낸 단어 선택은 절묘했지만 체크리스트의 범주를 잘 이해하지 못하여 블랙리스트의 존재를 인정한 꼴이다. ‘환경부 문건이 블랙리스트가 아니고 체크리스트일 뿐’이라는 말로 퉁치고 넘어가려다 오히려 ‘청와대가 개입한 블랙리스트가 있다’고 자복하는 꼴이 된 게다.

    ‘체크리스트’에서 보듯이 이 정권 들어서 그들이 만들어내는 언어의 현란함은 가히 역대 최고급이다.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운 나라’, ‘사람이 먼저인 나라’, ‘나라다운 나라’, ‘지금까지 가보지 않았던 새로운 나라’라는 정권의 모토가 집권 3년차에 민낯 본색이 드러나고 있다. 

    집권 공훈인사 자리를 마련하려고 그들은 국민들에게 줄 평등한 기회를 뺐었다. 자기들 편을 위해서 감투자리를 주는 과정이 국민들에게는 공정하지 못했고 그 결과가 정의롭지 않아서 블랙리스트 문건이 드러난 게다. 결과가 정의롭지 않으니 환경부 말고도 정부 여러 부처에서 제보자가 나타나고, 증언이 나오고 있다. 이러다간 머지않아 자기편끼리도 기회가 불평등하고, 과정이 불공정하며, 결과가 정의롭지 않다고 반기를 들 수도 있겠다. 

    이런 와중에도 여당 대표는 재집권하면 100년 집권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다는 야물 찬 야심을 공공연히 말하고 있다. 북한의 김 씨 왕조 권력조차도 앞으로의 100년이 불투명할 터인데 국민들을 매우 우습게 보는 천기누설적인 언행이다. 

    ‘탈(脫)원전 정책’을 ‘에너지전환 정책’이라 말만 바꾸고 ‘블랙리스트’를 ‘체크리스트’라면서 국민을 호도하고 정책을 치장하려 들지 말고 좋은 머리로 국리민복에 힘쓴다면 남은 임기나마 평탄하게 채울 수 있을 게다. 

    예로부터 ‘권불십년(權不十年),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고 했다. ‘100년 집권 운운’이라는 건 국민을 바보로 여기는 오만함의 발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