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로군정서 조직‧대종교이론 체계화 기여
  • ▲ 대종교 입교후 김교헌 선생.ⓒ독립기념관
    ▲ 대종교 입교후 김교헌 선생.ⓒ독립기념관

    독립기념관은 국가보훈처와 공동으로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끈 독립운동가 김교헌(金敎獻)선생을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31일 독립기념관에 따르면 김 선생의 공훈을 기리는 전시회를 8월 한달 동안 독립기념관 야외 특별기획전시장에서 사진 7점 등을 전시한다.

    1867년 7월 경기도 수원에서 4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난 김 선생은 1885년 정시문과에 급제해 예조참의(禮曹參議),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 등 여러 관직을 지냈으며 독립협회에 가입해 만민공동회에 참여했다.

    1906년 동래감리 겸 부산항재판소판사로 재직할 당시 일제의 경제침략에 맞서다가 통감부의 압력과 친일파의 모함으로 해직됐다. 이 모함 등의 계기가 항일의식이 고취되는 계기가 됐다.

    1910년 대종교에 입교한 김 선생은 총본사의 요직을 맡으며 민족종교로서 대종교 이론을 체계화하는데 기여했다.

    1914년에는 ‘신단실기(神檀實記)와 ’신단민사(神檀民史)‘를 저술해 단군과 대종교의 근본을 역사적으로 규명하고 민족사의 정통성을 체계적으로 정립하고자 노력했다.

  • ▲ 신문에 게재된 김교헌 선생 사망기사.ⓒ독립기념관
    ▲ 신문에 게재된 김교헌 선생 사망기사.ⓒ독립기념관

    1916년 김 선생은 나철의 뒤를 이어 대종교 제2대 교주에 취임했고,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만주 화룡현(和龍縣) 대종교 총본사로 망명했다. 이후에는 민족학교를 설립해 민족교육에 앞장섰고 교세를 크게 확장했다.

    또한 1919년 2월 만주 길림에서 독립운동가 39인 명의로 발표된 대한독립선언서에 제일 먼저 이름을 올렸다.

    김 선생은 대종교도를 중심으로 구성된 무장독립단체 북로군정서의 결성과 활동을 지도했으며 북로군정서군은 1920년 10월 청산리대첩에서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전투에서 패배한 일제는 대종교도를 무차별 학살했으며 이로 인해 대종교의 독립운동 기반이 약화됐다.

    김교헌은 본부를 영안현(永安縣)으로 옮겨 재건을 준비했으나 1923년 11월 18일 병으로 순국했다.
    정부는 김 선생의의 공적을 기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