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박규홍 서원대 명예교수.ⓒ서원대
    ▲ 박규홍 서원대 명예교수.ⓒ서원대


    고속열차는 빠르게 목적지에 도착해야 의미가 있다. 그래서 중간 정차역이 적을수록 고속열차가 제 역할을 한다. 그런데 요즘의 우리나라 고속열차는 그저 그런 ‘중속(中速)열차’ 밖에 안 된다. 고속열차 정차를 요구하는 지역의 민원 때문이다. 선거를 치를 때마다 정치인들의 입김으로 중간정차역이 늘어나서 이제는 고속철도 노선이 지나는 웬만한 지방도시역에 거의 정차하는 중속열차로 전락했다.  

    고속철도는 미국이나 중국처럼 땅이 넓은 지역에서는 초고속으로 달릴 수 있고 항공노선에 대비해서 가격이나 안전 면에서 경쟁이 될 것이다. 그러나 땅이 좁은 우리나라에서는 성능만큼 속도를 낼 수 있는 구간도 별로 없고 정차할 곳이 많아서 기존의 급행열차노선과 별반 차이가 없는 게 현실이다.

    KTX의 경우에 고속철도 도입 단계에서는 천안, 대전, 동대구를 중간 정차 역으로 하여 2시간 안에 부산에 이르도록 계획되었지만, 정치인의 입김에 따라 곳곳에 정차역이 생기면서 운행시간이 늘어났고, 대전권은 1시간30분, 대구, 전주권은 2시간, 부산과 광주 목포권은 2시간 30분 전후에서 더 이상 운행시간을 단축할 수 없는 구조가 된 것이다.

    예전의 새마을호나 그 보다 훨씬 이전에 있었던 특급열차보다는 많이 빨라졌지만 지역 민원으로 신설되는 정차역 때문에 목적지에 직행하는 노선이 되지 않는 한 예전의 새마을호 열차보다 약간 빠른 중속열차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이런 현상을 좋다고 봐야할 지는 입장에 따라서 다를 것이다. 중간 정차역이 필요한 지역에서는 운행시간이 다소 늘어나더라도 중간정차 역 신설을 환영할 테고, 그 때문에 도착시간이 지연된다고 생각하는 지역에서는 중간정차 역 신설에 반대할 것이다.

    정부나 철도당국의 입장에서는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형편이다. 마치 나막신 장사를 하는 아들과 짚신 장사를 하는 아들을 둔 어머니의 고민과 다르지 않다. 비가 올 때면 짚신 장사하는 아들이 걱정되고 날이 좋으면 나막신 장사하는 아들이 걱정되는 어머니 신세와 같기 때문이다.

    지금 KTX 세종역 신설을 두고 세종시와 충북도, 엄밀히 말해서 세종시와 극심한 갈등을 빚고 있다. 세종시는 오송역에서 세종시까지의 교통연계가 열악해 불편을 겪으므로 세종역을 신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충북도는 세종역이 신설되면 오송역의 기능이 쪼그라들 게 뻔하므로 반대한다.

    세종시가 지역구인 이해찬 의원이 총선 공약으로 내건 KTX세종역 신설과 관련해 여당은 물론 같은 당 소속 충북의 국회의원들이 발끈하고 있다. 이럴 때에는 이들이 국정을 다루는 국회의원인지 지역자치단체 의원인지 구분이 안 된다. 정치적 이념이 같아서 같은 당을 하는 사람들도 자신의 지역구와 표를 생각할 때에는 적군이 되는 모양새이다.

    필자는 세종시 건설초기에 행복도시가 ‘행정중복도시’가 될 거라면서 세종시 건설에 반대하는 칼럼을 쓴 적이 있다. 나라 밖으로 여행해보면 수도는 역사성과 상징성을 갖춘 그 나라의 얼굴임을 알 수 있고 서울도 그런 곳인데, 600년 도읍지 서울의 기능을 그렇게 마음대로 찢어 발겨서 행복도시로 옮기는 게 옳지 않다고 그 칼럼에서 주장했었다.

    그럼에도 지방분권론자와 지역균형발전론자들의 주장대로 또 정치적 이해에 얽혀서 세종시 건설은 강행되었고, 외교, 안보 부처를 제외한 정부부처가 세종시로의 이전을 마무리한 상태이나 예상한 대로 정부부처 분산에 따른 부작용과 행정낭비가 국가의 큰 부담이 되고 있다. 이제는 그런 부작용을 타개하기 위해서 국회와 사법부를 세종시로 옮겨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처음에 눈치 보며 발을 담갔다가 이제는 아예 몸통까지 담구겠다는 논리이다.  

    그러나 정부부처가 세종시로 이전하면서 지역균형발전의 상징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주변의 도시를 쪼그라들게 하는 역기능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KTX 세종역 신설 주장도 그런 현상의 하나이다. 세종역이 신실된다면 인근의 오송역과 공주역의 기능을 앗아가는 공룡이 될 것은 뻔하다. 그렇다고 나랏일을 하는 세종시 공무원들의 불편한 서울 출장길을 못 본 채 할 수도 없는 게 딱한 현실이다.

    그럼에도 필자의 견해는 세종역 신설에 반대이다. 세종역 신설에 반대하는 이유는 충북도의 편을 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곧 다가올 통일시대에 세종시의 역할이 소멸될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통일시대에 정부부처가 세종시에 머물러 있을 수 없을 것이라는 건 상식이 아니겠는가. 통일시대에 수도의 기능은 한반도의 중심에 있어야 할 것이고 세종시로 둥지를 튼 부처들이 다시 서울로 되돌아가는 게 정상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세종역 신설 시도는 세금만 낭비하는 비효율 정치의 전형으로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통일 이후의 세종시의 역할을 고려한다면 오송역과 공주역에서 세종시로 오가는 편리한 교통연계시설을 확충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고 현명한 방안으로 보인다.

    지역 갈등을 일으키는 세종역 신설 논란을 그만두고 충북도와 세종시는 머리를 맞대고 나라의 미래와 지역의 발전을 위한 현명한 상생방안을 찾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