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당시 마을 지키기 위해 경찰부대 조직, 인민군과 맞서 싸워
  • ▲ 단양경찰서가 13인 용사 묘역 추모행사에서 선배경찰들에게 경례를 하고 있다.ⓒ단양경찰서
    ▲ 단양경찰서가 13인 용사 묘역 추모행사에서 선배경찰들에게 경례를 하고 있다.ⓒ단양경찰서

    충북 단양군 영춘면 상리 동대재. 맞은편 태화산을 감싸 안고 북벽의 아름다움과 남한강의 물줄기가 굽이쳐 휘돌며 그림처럼 아름다운 곳.

    이 동대재 고개 중턱에 오르면 남한강이 바라다 보이는 양지바른 곳에 ‘순국 경찰 13인 용사 묘역’이 자리 잡고 있다.

    이 묘역에는 한국전쟁 당시 퇴각하는 인민군과 교전을 벌이다 조국을 위해 산화한 13인의 청년 경찰단원 영령이 잠들어 있다.

    6·25 한국전쟁 당시 충북 단양군 영춘면 의풍·동대·남천리 일대는 인천상륙작전으로 세가 밀린 인민군들은 북으로 퇴각하며 숨어 있다가 경찰부대와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던 곳이다.

    전투가 치열했던 이곳 영춘면 일대는 충북과 강원, 경상도가 접해있는 3도 접경지역이다.

    퇴각하던 인민군이 태백의 줄기 곳곳에 국군이 막아서자 태백과 소백산맥이 만나는 단양군 영춘면 의풍리와 동대리 일대에 숨어들었다.

    숨어든 인민군들은 인근 마을에 침입해 부족한 식량과 가축을 탈취하고 주민을 식량운반에 동원하는 등 주민들에게 많은 피해를 입혔다.

    하지만 국군의 주력부대는 이곳의 실정을 알 수도 없었으며 병력을 파견할 여유조차 없었다.

    9·28 서울수복과 함께 북으로 퇴각하기 위해 몰려든 인민군 패잔병들로부터 지역을 지키는 일은 고스란히 경찰과 지역주민들의 몫으로 남겨졌던 것이다.

    지역경찰과 도 파견 충북경찰, 지역의 청년들은 마을을 지키기 위해 자체적으로 경찰부대를 조직하고 인민군들과 맞서 싸웠다.

    경찰부대를 조직한 이들은 6·25 전쟁이 발발한 1950∼1951년까지 단양군 영춘면 남천·의풍·동대리 전투에 각각 참여해 인민군과 교전을 벌였다.

    3개 전투에서 당시 꽃다운 나이인 20세 박노대·조병황 순경과 조규현(당시 22세), 고승섭(23세), 석종철(23세), 이원실(26세), 유명근(26세), 이완식(26세), 김태명(29세), 서영수(31세), 박노현 순경(33세)과 김병호 경사(24세), 김치운 경사(30세)등 13명의 경찰관이 순직했다.

    한국전쟁은 끝났지만 어려운 국내 사정 등으로 이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점차 사라져 갔다.

    충북 단양경찰서는 한국 전쟁이 끝난 35년만인 지난 1985년 11월,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무덤을 찾아 선배들의 호국정신을 기리고 이들의 영령을 위로하기 위해 단양군 영춘면 상리 동대재 중턱에 유해를 안치했다.

    현충일인 6일 단양경찰서는 순국 경찰 13인 묘역을 찾아 주변 환경을 정비하고 조국을 위해 승화한 선배 경찰관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고 넋을 위로했다.

    오지용 서장은 추모사에서 “조국과 지역 주민의 재산과 생명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한 몸을 아낌없이 희생한 선배 경찰관과 의용경찰대원들의 호국정신을 본받아 후배 경찰관으로서 민생치안 확립에 더욱 매진하겠다”고 밝혔다.

    ‘순국 경찰 13인 용사 묘역’은 6·25를 경험하지 못한 학생들과 경찰학교, 경찰대학 등 학생들의 안보 견학장으로 관심을 모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