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왜 아직도 왕조시대에 기휘하듯 '文대통령'인가
  • 대한애국당 조원진 대표. ⓒ뉴데일리 공준표 기자
    ▲ 대한애국당 조원진 대표. ⓒ뉴데일리 공준표 기자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가보면 조선왕조실록이 전시돼 있다. 실록을 보면 도중에 빨간색의 조그만 비단 조각으로 책의 글자 하나를 덮어놓은 대목이 보인다.

    이른바 기휘(忌諱)를 한 것이다. 왕조시대에는 나랏님의 이름글자를 함부로 소리내 말하거나, 보이게 쓰는 게 금지돼 있었기 때문이다.

    사서(史書)이니 후세에 임금의 이름자가 뭐였는지 전하기 위해 사관이 할 수 없이 붓을 들어 쓰기는 쓰지만, 남에게 보이지 않게끔 빨간색 비단으로 덮어놓는 왕조시대의 유물이다.

    대한애국당 조원진 대표가 11일 정당정책토론회에 출연해 문재인 대통령을 "문재인 씨"라고 호칭했다 해서 나라가 소란스럽다. 이른바 친문(친문재인) 성향 누리꾼들은 조원진 대표가 참람한 대역(大逆)의 죄라도 저지른 것처럼 벌떼같이 아우성이다.

    조원진 대표는 3선 의원으로 제1야당의 수석최고위원까지 지냈던 경륜의 정치인이다. "문재인 씨"라는 호칭이 아무런 정치적 고려 없이 튀어나온 막말이라고만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정치권에서는 제왕적 대통령제의 권력을 분산하자는 분권 논의가 활발한데도, 문재인 대통령이 버티고 있는 청와대는 정작 권력구조 개편 논의에 소극적이다.

    심지어 개헌의 핵심인 제왕적 대통령제 권력구조 개편을 제외한 개헌안을 발의할 수 있다는 시사도 있었다. 이는 '앙꼬 빠진 찐빵'이며, 시대정신의 역주행에 다름 아니다.

    이런 국면에서 조원진 대표의 "문재인 씨" 호칭은 우리 사회 곳곳에 봉건왕조시대의 잔재로 스며들어있는 제왕적 대통령제를 향한 합리적 의문을 제기했다고 봐야 한다.

    당장 이 기사의 제목만 봐도 조원진 대표는 그냥 '조원진'이다. 어느 매체도 '趙대표'라고 쓰지 않는다.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대표나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도 마찬가지다. 기사 제목에서 호칭을 줄여쓸 때는 그냥 추미애·홍준표·안철수다. 秋·洪·安이라고까지 줄여쓸지언정 秋대표·洪대표·安대표라고 쓰는 경우는 없다.

  •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1월 1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시정연설을 하고 있다. ⓒ국회 사진공동취재단
    ▲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1월 1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시정연설을 하고 있다. ⓒ국회 사진공동취재단

    그런데 대통령만은 다르다. 바로 전날, 개표하기 직전까지만 해도 그냥 '문재인'이라고 써도 되던 사람이 당선되고나면 꼬박꼬박 '文대통령'이라 쓰인다.

    이전의 朴대통령도 마찬가지다. 당대표나 비상대책위원장 시절에는 박근혜, 박근혜라고 잘만 쓰다가도 대통령만 되고나면 나랏님으로 즉위라도 한 것처럼 '朴대통령'이다.

    대통령만 유독 이름자를 그대로 쓰면 무슨 불경죄(不敬罪)라도 짓는 것 같은 왕조시대의 유산이 남아 있는 셈이다.

    도대체 왜 대통령 이름을 그대로 쓰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언론사들이 제목에서 기휘를 하는지, 정당정책토론회 사회자는 "문재인 씨" 호칭이 나오자 자신이 불경죄의 공모공동정범이라도 된 것처럼 사시나무 떨 듯 떨며 "대통령 호칭에 대해 주의를 기울여달라"고 사정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지난 반 년간 꼬박꼬박 제목에 '文대통령'이라 쓰면서, 마치 왕조시대의 신민(臣民)으로 전락한 것 같아 너무나도 굴욕적인 감정을 참기 힘들었다. 왜 새정치민주연합을 출입하던 시절에는 제목에 '문재인'이라 쓸 수 있었는데 이제는 그렇게 할 수 없는지, 마치 누구는 임금으로 즉위하고 누구는 다스림을 받는 백성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조원진 대표의 "문재인 씨" 호칭은 이러한 우리 사회 내부의 제왕적 대통령제 잔재에 대한 합리적 문제제기로서 큰 가치를 가지는 셈이다.

    이외에도 우리 사회에 제왕적 대통령제의 잔재는 너무나 많이 남아 있다.

    대통령이 국회에 시정연설을 하러 오는 것은, 세금을 내는 납세자인 국민의 대표들에게 "내신 세금을 이렇게 쓰도록 하겠다"는 보고를 하러 오는 것인데, 왜 국민의 대표들이 대통령이 입장할 때 일제히 기립을 해야 하고, 훈시를 듣듯 시종 엄숙한 분위기로 청취를 해야 하는지도 이해 못할 일이다.

    의회민주주의의 발상국인 영국에서는 국왕이 상·하원 합동총회에서 시정연설을 할 때, 의원들이 일부러 소리를 내어 수근수근 떠드는 게 헌정의 관례로 돼 있다. 국민의 대표가 권력의 대표보다 높다는 상징적 퍼포먼스다.

    궁극적으로는 개헌을 통해 권력을 분산함으로써 제왕적 대통령제를 끝장내야 한다. 그러나 그와 관계없이, 우리 사회 곳곳에 아무런 합리적 이유 없이 남아 있는 왕조시대의 잔재들을 말끔히 털어내는 과정 또한 부단히 이뤄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