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권정 교수 "당시 정치 상황에서의 기독교 역할, 해방 정국에 대한 이해 지평 넓혀줄 것"
  • 16일 오후 서울 중구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제78회 이승만 포럼이 개최됐다.ⓒ뉴데일리 공준표 기자.
    ▲ 16일 오후 서울 중구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제78회 이승만 포럼이 개최됐다.ⓒ뉴데일리 공준표 기자.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을 목전에 둔 한반도 근현대사에서 기독교가 구심점 역할을 했다는 주장이 제기돼 이목을 집중시킨다.

    16일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열린 제 78회 '이승만(李承晩) 포럼'에 발표자로 참석한 김권정 대한민국 역사 박물관 학예사(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는 '해방 후 정치사회 동향과 기독교 세력의 역할'을 주제로 강연을 진행했다.

    한국 근현대사를 전공한 김 교수는 "개항 후 가장 큰 시대 과제는 부국강병이자 본인을 방어할 수 있는 물리적 힘과 경제력이었다"고 꼽으며 "오늘날 북핵위협 속에서의 한미 동맹, 이를 견제하는 중국 러시아 등의 국제 정세 역시 당시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산업화-민주화로 이룩한 한국인 자부심이 흔들리고 있는 오늘, 지난 해방 후 정치사회 동향과 기독교 세력의 역할을 미루어 지금 사회 모습을 살펴보고자 한다"고 강연의 취지를 전했다.

  • 16일 오후 서울 중구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제78회 이승만 포럼이 개최된 가운데 김권정 대한민국 역사 박물관 학예사(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가 강연을 이어가고 있다.ⓒ뉴데일리 공준표 기자.
    ▲ 16일 오후 서울 중구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제78회 이승만 포럼이 개최된 가운데 김권정 대한민국 역사 박물관 학예사(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가 강연을 이어가고 있다.ⓒ뉴데일리 공준표 기자.

     

    ▶ 해방과 시대과제, 기독교

    "해방이 독립으로 연결되지 못했다"고 주장한 김권정 교수는 당시 남북 분단, 미소 군정 등 불완전한 국내상황으로 인해 국가건설 문제가 1순위 시대적 과제로 떠올랐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과정에서 해방 후 한국 상황은 미국과 소련 등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들과 연계를 맺으며 다양한 정치세력이 경쟁하는 체제선택전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었다"고 전하며 "한반도 및 이를 둘러싼 국제환경을 반드시 함께 보아야 해방정국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힐 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이 과정에서의 기독교(개신교)가 어떻게 종교적 공동체를 넘어 정치사회 세력으로 변모할 수 있었는지를 짚었다.

    19세기말까지도 서양을 '오랑캐'로 인식했던 당시 중국(청)은 영국,일본 등에 군사적으로 대패하며 3천년 이상을 지속시킨 중화문명의 와해를 맞는다.

    당시 갑오개혁 등 대내적으로는 전통 유교질서 신분사회 변동을 맞던 한반도 사회에는 기독교가 유입되고 이후 급변하는 정세와 맞물려 정치사회화 된 기독교 세력이 형성됐다고 김 교수는 전했다.

    그는 "기독교 세력은 이후 일제 치하 국권회복 운동과 민족주의 진영의 다양한 운동에 참여하는 등 2차세계대전 후 급격히 재편되는 국제사회 흐름을 읽어내며 해방정국 하 국가건설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 해방 직후 기독교계 동향과 국가건설론

    김권정 교수는 "해방 후 공산체제 및 위성국가라는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출발한 소련 군정은 북한 지역에서의 기독교를 단순한 신앙에만 국한했다"며 이에 대규모 기독교인들이 월남했고 기독교에 우호적인 미군정, 즉 서구사회에 대한 이해도가 높던 다수의 기독교인이 미군정 활동에 참여했다"고 전했다.

    그는 "당시 이승만, 김구, 김규식 등 우익진영 인사들은 모두 기독교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하며 "남한은 이처럼 정치지도자들 속에 기독교 정신이 정치사회 주요 의식으로 떠올랐다"고 말했다.

    실제로 조선기독교남부대회 주최의 '임시정부요인환영대회(1945.11.28)에 참석한 이승만, 김구, 김규식 등은 '기독교를 건국기초로 삼을 것'을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두고 김 교수는 "이들 정치세력은 반소-반공주의 입장에서 자유와 평화를 가치로 내세우며 민주주의 제도를 주장했고 통상무역을 통한 시장경제를 표방하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정치사회 세력화된 기독교인들이 개인 자유와 인권에 대한 폭력을 허용하는 소련 공산주의를 '파시즘', '나치즘'과 같은 전체주의로 규정하면서 자연스럽게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반공'방향으로 흘러가게 됐다는 것이다.

  • 16일 오후 서울 중구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제78회 이승만 포럼이 개최된 가운데 김권정 대한민국 역사 박물관 학예사(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가 '해방 후 정치사회 동향과 기독교 세력의 역할'을 주제로 강연을 진행하는 모습.ⓒ뉴데일리 공준표 기자.
    ▲ 16일 오후 서울 중구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제78회 이승만 포럼이 개최된 가운데 김권정 대한민국 역사 박물관 학예사(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가 '해방 후 정치사회 동향과 기독교 세력의 역할'을 주제로 강연을 진행하는 모습.ⓒ뉴데일리 공준표 기자.

    ▶ 기독교 세력의 활동과 의미들

    김 교수는 "당시 해방 후 미소군정의 신탁통치안을 두고 대중들은 이를 민족 자존심의 문제로 인식했다"고 밝혔다.

    "결과적으로 신탁통치에 찬성한 좌익과 반대한 우익진영으로 나뉜 이후 우익은 '좌우합작을 통해 신탁통치 내에서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임시정부 구성에 참여할 것을 주장했다"고 말했다.

    이같은 배경에서 '기독신민회'(1945.12.1)가 창립돼 당시 조선기독교청년회전국연합회 소속이던 김규식을 회장으로 추대했고, 이는 좌우합작운동의 지지기반이 됐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 필요 주장이 처음 제기됐던 1946년 6월경, 이미 북한은 토지개혁을 비롯한 단독 국가체제 기반 구축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상태였다.

    김 교수는 "이쯤 기독교인들이 주도해 '민족통일총본부'(1946.6.27)을 결성했고, 이는 정부수립을 통한 국가건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는 배경이 됐다"며 "두 차례에 걸친 미소 공동위원회 결렬로 신탁통치 합의가 파기되자 자연스럽게 사회 이슈는 단독정부 수립으로 옮겨갔다"고 했다.

    익히 알려져있듯 당시 이승만과 같은 노선을 걷던 김구와 김규식은 '남북협상'을 제안했다. 그러나 북한 공산세력이 우익인사 배제와 일방적 개최 통보로 인해 남북협상은 결국 소득없이 참여 의미를 두는 데에만 그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김 교수는 "이 시기쯤 그리스도교연맹(1947.12)은 기독교 정신에 기초한 민주주의 국가건설을 표방하며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한 이승만을 공식적으로 지지하고 나섰고, 북에서 월남한 개신교인들이 '반공노선'을 표방하며 이승만의 정부수립 운동에 참여하게 됐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정치분야에서 기독교 세력의 상징적 이미지는 1948년 8월 15일 건국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하나님과 동포 앞에서 나의 직무를 다하기로 일층 더 결심"한다고 맹세한 부분에서 절정을 이룬다"며 "당시 기독교인들을 정부관료로 기용해 정-부통령과 국무총리를 제외한 21개 부서장 중 9명이 기독교인이었다는 점을 보면 해방-건국의 기독교 세력의 역할을 인지할 수 있다"고 말했다.

    끝으로 김 교수는 "해방 후 전개된 남북 분단, 정치상황에서 대한민국 건국까지 기독교인들의 역할과 이들의 활동 배경이 된 당시 현실 인식, 정치사회단체 결성을 통한 세력화 등 일련의 활동에 대한 방향과 당시 논리의 재검토가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이해도를 제고시킬 것"이라는 말로 강연을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