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선 넘지마라" '북한 관여말라" ...유엔 내세운 미국분노한 이승만, 정면 대결...평양 달려가 "남북이 뭉치자"
  • [연재] 이승만史(2) 한미동맹의 탄생 ② 통일의 눈앞에서

    인 보길 /뉴데일리 대표, 이승만 포럼 대표

    이 노래, 찢어진 조선8도의 명승을 노래하는 신민요, 일제때는 나라 없던 때라 인기였고
    해방후엔 국토가 반토막 나서 더욱 울며 부른 노래, 나도 곡이 좋아 따라 불렀다.
    6.25때 열살짜리 필자는 이 노래를 아버지에게서 배웠다.
    노래를 사랑한 아버지가 일제때 서울 유학 갔다오면서 축음기(蓄音機)를 가져온 뒤로
    바닷가 시골집은 일약 동네의 명소가 되었으며 이웃 누나들이 뻔질나게 드나들었고
    소리 잘하는 유성기(有聲器)는 우리 학교 친구들까지 몰려와 몸살이 날 지경이었다.
    읍내를 점령한 북한군에게 석달 남짓 시달린 그 해 추석이 지난 얼마 뒤, 휘영청 밝은 달빛 아래 풍악이 울렸다. 인민의 반동들을 다 죽인다던 따발총 빨간 병정들이 “도망쳤다”며
    이장님 댁 마당에 모여든 마을 사람들은 “곧 통일된다”고 막걸리판이 벌어졌다.
    까맣고 동그란 음반 흑연판에서 흘러나오는 ‘조선팔경가’(朝鮮八景歌), 일제하 1936년 히트곡은 대망의 ‘북진 통일’이 다가 온 듯 “우리도 금강산 구경 가요” 덩실덩실 춤을 춘다.
  • 일본회사 폴리도르가 1936년 내놓은 '조선팔경가' 음반.(자료사진)
    ▲ 일본회사 폴리도르가 1936년 내놓은 '조선팔경가' 음반.(자료사진)
<1절> 에헤~ 금강산 일만이천 봉마다 기암이요
      한라산 높아~ 높아~ 속세를 떠났구나
      (후렴) 에헤라 좋구나 좋다, 지화자 좋구나 좋다
            명승의 이 강산아~~ 자랑이로구나!
‘신민요’로 이름 날린 평양기생 출신 선우일선(鮮于一鮮), 옥통소 같다는 목소리가 간드러지게 꺾어지면 삼베 잠방이 농군들이 들썩들썩 “조오타아...” 막걸리 사발까지 흔든다.
<2절> 에헤~ 석굴암 아침 경(景)은 못 보면 한이 되고
      해운대 저녁~ 달은~ 볼수록 유정(有情)해라 (후렴)
남쪽의 명승 중에 경주의 불국사 석굴암, 그리고 일본이 개발한 해운대 해수욕장의 달밤을 읊은 멜로디는 빠른 템포로 다시 북을 찾는다. 높은 산이 많은 북쪽엔 8경도 많다.
  • 가수 선우일선. 평양기생 시절 모습.(자료사진)
    ▲ 가수 선우일선. 평양기생 시절 모습.(자료사진)
  • <3절> 에헤~ 캠프의 부전고원 여름의 낙원이요
          평양은 금수~강산~ 청춘의 왕국이라 (후렴)
    ‘캠프의 부전고원’이란 ‘한반도의 지붕’이라는 개마고원(蓋馬高原)의 중심 피서지를 말한다.
    삼복에도 최고기온이 20도 아래, 부전강을 막아 생긴 인공호수 ‘부전호(赴戰湖) 일대는 일본인과 조선 부자들 별장지대였고 여름엔 야영을 즐기는 캠프촌이 늘어서곤 했다.
    이웃 장진군에도 장진강에 댐을 막은 장진호(長津湖)가 있어 두 곳의 수력발전소는
    압록강 수풍발전소에 버금가는 전력을 생산하여 흥남 비료공장 등 공업지대 에너지 젖줄이었다. 이 장진호는 그해 11월 중공군과 미군이 역사상 처음로 맞붙어 최악의 혈전을 벌인 곳이다.
    1만2천여명 미해병대가 15만명의 중공군 협공에 거의 전멸했지만 열흘이나 적군을 막아내
    군민20만명의 흥남철수 길을 열어주었다.
    <4절> 에헤~ 백두산 천지 하엔 선녀의 꿈이 길고
          압록강 여울~에는~ 뗏목이 경(景)이로다 (후렴)
  • 개마고원의 장진호의 겨울. 6.25때 미국과 중국이 역사상 최초로 전쟁한 곳.
    ▲ 개마고원의 장진호의 겨울. 6.25때 미국과 중국이 역사상 최초로 전쟁한 곳.
    이 압록강에 우리 국군이 먼저 도착했다. 압록강 장악은 남북통일의 신호탄과 같은 상징적 작전이기에 국군은 “유엔군 보다 우리가 먼저 압록강을” 점령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달려갔다.
  • 10월 26일 제6사단 7연대 장병들은 풍덩풍덩 국경 강에 뛰어들어 땀에 젖은 몸을 딩굴면서
    저마다 수통에 기념수 강물을 담았다. “경무대로 보내자” “우리 대통령에게 통일의 압록강물을
    보여주자” 당시 우리 국군은 그렇게 통일의 열망으로 뭉쳐있었다. “릴레이...릴레이...” 강물 수통들이 후방으로 건네져 서울 대통령관저 경무대까지 도착한 이야기는 전사의 신화로 남았다.
    일패도지로 쫓겨가는 공산군을 추격하는 국군은 국토탈환에 경쟁적으로 달려들만큼 사기가 높았다고 국내외 전사 자료들이 수많은 기록들을 전하고 있다.
    국군의 전투경쟁은 ‘38선 돌파’때부터 본격화하였다고 한다.
    성공 확률 5천대 1이라는 인천상륙작전에 이어 수도 서울 수복, 중앙청 국기계양대에서 인공기-중공기를 끌어내리고 태극기로 바꿔 단 국군은 하룻만에 38선에 도달하였다.

    뜻밖의 명령 "38선을 넘지마라. 유엔이 결정할때까지..."

    그때 뜻밖의 장애물이 나타났다.
    “38선을 넘으려면 유엔의 결정을 기다려라” 유엔사령관의 특별명령이 떨어진 것이었다.
    국군은 유엔군의 일원, 이승만 대통령이 6.25발발 직후 7월14일 전시작전권을 맥아더에게 넘겼기 때문에 맥아더 명령을 기다려야 한다. 
    9월29일 수도서울 환도식때 기도의 눈물을 닦은 이승만은 맥아더에게 다짐하였다.
    “지체없이 북진해야 하오. 적군이 재정비할 여유를 주지말고 38선을 넘어 통일해야지오”
    맥아더도 고민했다. 이 38선정지 명령은 소련의 개입을 염려한다는 국무성의 ‘장난’임에 틀림없었다. '전쟁의 목표는 승리뿐'이란 전쟁관이 뼈속까지 배인 2차대전의 영웅 맥아더, 그는 한국참전을 결심한 순간부터 공산침략군을 무찌르고 한반도를 통일해야한다는 목적이 분명하였고 국방성은 그를 변함없이 적극 지지해주었다. 이승만과 신념으로 통하는 그였지만 유엔을 거역해야 하나.
  • 서울 수복 환도식(1950.9.29)에서 맥아더에게 감사장을 수여하는 이승만 대통령.(자료사진)
    ▲ 서울 수복 환도식(1950.9.29)에서 맥아더에게 감사장을 수여하는 이승만 대통령.(자료사진)

  • "38선을 돌파하라" 이승만이 붓글씨로 쓴 진격명령서


    이승만은 즉각 경무대로 군수뇌들을 집결시켰다.
    정일권 총장의 어깨에 붙은 계급장을 가리키며 “이 별은 누가 달아주었나?” 물었다. “각하께서 달아주셨습니다” 대답하자 이승만은 “미국쪽인가? 한국쪽인가?” 다구치면서
     “38선을 넘어도 되는가? 안되는가?” 젊은 장성들의 눈을 둘러보았다.
    “각하의 명령이라면 넘어야합니다” 육본 인사국장 황헌천의 대답이 돌아왔다.
    빙긋이 웃는 이승만은 붓글씨로 쓴 작전명령서를 정일권 총장에게 건네준다.
    [대한민국 국군은 38선을 즉시 돌파하라. 1950년 9월30일 대통령 이승만]
    전작권을 유엔군에 넘긴 이승만이 국군통권자의 독자적 권한을 행사하는 순간이었다.
    이때 국군은 이미 38선을 넘어가 있었다. 험준한 산악지대에 38선이란 선은 없었으니까.
    10월1일 제3사단 23연대가 양양까지 들어가 있던 날, 정일권은 오전 11시반에 “제1군단은 38선을 넘어 북진하라”는 공식명령을 내린다. 일주일후 10월7일 유엔조 ‘북진’을 결의한다.
    이승만의 ‘붓글씨 진격명령서’는 군국은 물론 미군을 감동시키고 유엔까지 움직였다.이 10월1일은 휴전후 1956년 ‘국군의 날’로 지정되어 기념하고 있다.

    평양 탈환...김일성은 신의주로 강계로 도주길

    발동이 걸린 북진(北進)은 가속도가 붙으면서 10월10일 원산을 점령하고 10월19일엔  마침내 평양을 함락시킨다. 낙동강 다부동 전투에서 나라를 지킨 30세의 맹장 백선엽 준장이 제1사단을 이끌고 적도(敵都) 평양까지 제1착으로 태극기를 꽂은 것이다. 그는 다음해 중공군에 다시 빼았긴 서울을 재탈환하는데도 앞장서 성공한다. 전선은 날마다 북상하고 북한정권은 신의주로 강계로 도망치기 급급하고 무저항의 패잔병도 도미노처럼 스러지는 대역전극, 자유의 십자군은 질풍노도와 같이 북한 전역을 석권하였다..
     해방후 5년간 고대하던 남북민족통일이 코앞까지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국군이 북위40도선을 돌파하여 함경북도 청진으로 향하던 날, 이승만은 장문의 대통령 유시(諭示)를 발표한다. 조선일보가 보도한 내용을 읽어보자.
  • 1950.10.24.일자 조선일보 
    이대통령 유시
    "우선 心的統一...남북동포 협조하라!"

    용감무쌍한 국군의 용전으로 남북통일의 성업이 날로 진척되고 있는 이때
    3천만동포는 총궐기하야물심양면으로 군경에 협조하야 추호라도 성업완수에 유루 없기를 기해야 하겠거니와, 이대통령은 21일 다음과 같이 특별담화를 발표하야 남북동포의 일층 협조를 요청하였다.

    "단군기자(檀君箕子)의 적손으로 4천여년 역사적 민족으로서 40년간 적의 압제하에서 고통을 면하게된 후 소련의 세계정복주의하에 공산당 괴뢰악마의 반역행동으로 소위 38선을 한정하고 남북을 강제로 분열시켰으나 이남에서는 총선거를 실시하고 민주정부를 수립해서 세계문명국가의 승인을 얻어 날로 진전시켜나가는 중 주야로 분투한 바는 우리의 힘으로 남북을 통일해서 이북동포들을 하루바삐 속박과 압제하에서 해방시키려던 것이었고, 또 이것을 뼈에 맺히고 피가 끓도록 주장해온 것이나 세계대세에 끌려서 우리가 뜻해도 못하고 하회(下回)만 기다리고 오던중
    이번에 공산도당들이 소련의 후원을 의지해 대전쟁을 차려가지고 우리나라를 소련의 속국으로 만들고 우리를 타국의 노예로 만들려고 도처에서 살인방화를 일삼아 우리가 일시 위기에 이르렀던 바이다. 

    다행히 연합군이 들어와서 소련의 침략을 방비하고 우리를 도와서 싸운 결과로 38선을 삭제시킬 뿐만 아니라 우리 국군이 승승장구해서 며칠 안에 압록-두만강까지 밀고 올라가서 국토를 완전회복할 것이니 이로써 우리 조상의 유업을 다시 회복시키고 이북동포를 비로소 해방시켜 완전무결한 통일국가로서 세계 우방의 원조를 얻어 파상(破傷)된 도시와 교량과 가옥과 공장을 일일이 복구시키는 동시에 공업과 상업을 발전시켜 신국가를 이루어 민국(民國)정부 하에서 신생활을 영위하여 만세복리의 자유기반을 굳건히 함으로써 자손만대에 영구히 강토를 유전케 하자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목적이니

    이북동포들은 조금도 차별이나 제한이 없이 남북이 다 같은 권리와 직책을 분담해서 한민족 한족속의 정신과 행동을 동일히 지켜나가야 할 것이다. 국가의 통일에 있어서 서로 투쟁하는 중에 국세를 미약하게 만들었고 남북민심이 분리될 만치 된 것을 우리가 간담에 맺히는 유감사로 여기는 바이지만 우리가 지금 누가 잘하고 못한 시비를 캐려는 것이 아니고 다만 남북통일을 완수하는 벽두에 내가 이남이북 동포들에게 한 말로 충고하고자 하는 바는 우리는 오늘부터 과거의 모든 페단을 일소하고 3천만이 다 한 지체(肢體)요 한 가족으로서 서로 믿고 돕기로만 작정하고 사사이해(私事利害)나 친소인연(親疎因緣)해서 조금이라도 서운한 생각을 가지고서는 우리가 또 일후 자손들에게서 면치 못할 죄명을 쓰게 될 것이다.

    지나간 44년동안 우리가 지옥생활을 당하게 된 것은 우리민족이 합해서 다 같이 살자는 민족정신을 잃어버리고 관민들이 각각 사심과 사정으로 동포를 해하매 나라를 결단내고라도 자기 혼자만 살려한 결과로 이렇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해내해외에서 40년동안 독립운동으로 생명과 재산을 희생하며 애국애족의 의남의녀(義男義女)들을 앞세우고 분골쇄신하며 용투용진(勇鬪勇進)하여 왔으나, 불행히 지방구별을 고취하는 개인과 단체가 있어서 이것을 가지고 도처에서 싸우는 중에 애국남녀들의 통탄과 외국인사들의 비평을 면치 못하게 된 것을 누구나 한탄치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공산분자들이 남북인심을 분열시키기에 전력을 다해서 모든 악선전으로 사람의 마음에 독약을 넣어주어서 지식이 약한 남녀의 마음을 혼란시키도록 만든 것을 우리가 또한 명확하게 보고 있는 바로서, 우리가 다 이것을 통분히 여기고 서로 계몽하여 서로 결탁해서 그러한 선동과 해독을 막지 않고는 우리 민족의 장래가 또 다시 암담하게 될 염려가 있을 것을 조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지난날에 문호를 닫치고 우리나라가 혼자 살적에는 편당싸움이나 정당싸움을 하면서도 나라를 보전할 수 있었으나 지금은 국제상 서로 연결되어 사는 세상이므로 이때에 우리가 동서남북이나 상하관민을 물론하고 한덩어리 한뭉치가 되어 서로 보호하여 서로 제휴하지 않고서는 국체도 보전할 수 없고 국권도 보지하지 못하면 인민의 자유권을 누릴 수 없어서 필경에는 또 다시 남의 노예가 될 것이니 우리가 이것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오늘 이 대전에 우리의 열렬한 피와 우방군인들의 피를 흘리며 희생해서 성취하는 통일이 또한 무효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이때에 우리 부여(扶余)족속의 모든 남녀들은 문벌이나 지위나 파당적 구별을 다 혁파하고 법률 밑에서는 모두 다 동등한 백성이요 세계에 대해서는 다 한족속의 결심으로 대작(對酌)할만치 되어야만 우방의 추앙을 더욱 받을 것이요, 동시에 적국의 침략을 방비해서 우리 3천리강산에 소출되는 물자와 우방에서 원조해주는 물품을 이용하야 농업을 개량하며 공업과 상업을 세계에 발전시켜야 부강한 국가로서 자유 복락을 다 같이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공산분자나 불평분자들이 무슨 선전이나 어떤 감언이설로 민족 상호간과 분열을 조장하는 일이 있으면 이에 대해서는 개인으로나 단체로나 이를 다 극복해서 이런 분자들이 의뢰할 곳이 없도록 만들어 놔야 할 것이다. 

    통일 벽두에 이 정신을 이남이북 동포들에게 일일이 알려주어 각성코저 하는 바이다.
    이 전쟁은 거의 다 결말이 난 것이니 타국의 세력을 의거하고 민족을 위협하야 남의 노예로 만들려고 하던 자들 중 극렬한 분자들은 이북동포들이 철저히 알고 있을 것이므로
    이런 분자들은 친가질이나 형제간이라도 포용치 말고 국법대로 정죄해야 될 것이며
    남의 선동에 따라다니던 자들이나 또는 위협에 끌려서 복종하던 자들은 다 회심개과하고 애국애족의 정신으로 국법을 지키며 직책을 행하기로 서약한 후에 다 해방시켜서 전과를 탕척할 것이다. 

    또 이북남녀 중에 가정을 버리고 이남에 와서 풍찬노숙하며 지내온중 통일 촉성을 위하야 열렬히 분투노력하던 형제자매들이 도민회를 조직하야 자치자호(自治自護)하던 단체 중에서 명망있는 지도자들을 택하야 5도지사의 임명을 주었으니 우선 해방되는 도마다 먼저 들어가서 치안과 후생을 주관함으로써 각도 당해지사의 책임을 이행할 터이나,  이에 대해서도 이북동포의 공론에 운행하기 위하야 도내의 민심이 정돈 되는대로 각 해당도민들의 자유분위기 속에서 유엔 감시하에 투표로 선정하도록 노력할 것이니 민간에서 하루바삐 민심을 정돈시켜서 선거방식을 행할만치 만들면 준비 되는대로 곧 지사선거를 행할 것이요.
     그 후로는 할 수 있는대로 속히 국회의원을 인구비례로 10만명에 한사람씩 선거해서 국회의 자리를 채우게 할 것이며, 서북청년단은 열렬한 청년지도자들 중에서 원만한 조직체로서 이루어진 이남청년단 중 한부분이므로 통일촉진과 반공투쟁에 다대한 공적을 가진 단체인바 이 단원들이 전선 뒤로 들어가서 치안과 계몽과 조직 등에 군경을 도와 적극 노력할 것이니 이북에 남아있는 모든 청년들은 다 이 청년단과 합동해서 불충불의한 분자를 일일이 적발하야 당국에 붙여서 법적으로 처리하게 될 것이며 도시와 촌락에서 국법과 생명재산을 보호하기에 협의적으로 진행하되 민간에 강요하는 폐단이나 또는 불법의 행동은 계엄헌법으로 처리하게 될 것이다.

    식량이 없어서 굶주리는 사람에게는 위선 정부에서 백미와 잡곡을 배급해서 구제사업에 착수할 것이나 한편으로 추수를 부지런히 해서 금년에 추수되는 식량은 이남에서 실시하는 법안에따라 2할이나 3할 정도는 지세 기타로 정부에서 수납하고 그 외는 농민들이 다 차지할 것이며 추수가 지난 뒤에는 농지개혁법을 실시하야 농지는 이전 농주에게 돌리되 농주는 적당한 가격으로 정부에 팔고 정부에서는 그것을 법에 따라 농민들에게 분배한 후 공정한 가격으로 값을 다 주고 사는 사람은 완전히 자기의 소유로 만들 것이요, 그렇지 못한 사람은 매년 얼마씩 갈라서 다 갚은 뒤에 자기 소유가 될 것이며 농주들은 지가로 정부에서 채권을 받아서 그 채권으로 공업이나 기타 영농자본을 삼을 수 있도록 만들어 농민들에게서 대금을 다 받는대로 이를 다 보상할 것인바, 금년은 이미 늦어서 이를 시행할 수 없으므로 내년부터 이 법안을 실시하게 될 것이다. 

    이 밖에 금융상공 및 귀속재산에 관해서는 이남에서 행하여 온 정부의 정책과 동일한 것이나 ....(판독불가)...끝으로 다시 부탁하는 바는 우리가 합하면 서고 나누면 쓰러진다는 것이니
    이번 강제분열로 인연해서 남북동포가 애호하고 서로 협조하는 정신과 맥이 전보다 더 공고하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기는 동시에, 사람마다 정신과 기맥을 더욱 충실히 하기 위하야 남북동포들이 성심껏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4283년 10월 21일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

    남북 국토 통일을 확신한 이승만은 우선 5년간 분리되었던 남북동포들에게 “마음의 통일”을 강조하였다. 공산당 선전선동에 세뇌된 북한 둥포들을 안심시키면서 차별없이 평등한 포용과 화합을 당부하고, 악질적인 공산분자는 형제자매라도 의법처벌해야한다고 못을 박았다. 동시에 고질적인 지방색과 파벌싸움에 대한 경고도 잊지않았다. 특히 굶주리는 전후복구와 식량구제를 약속하였고, 공산정권에 무상몰수당한 농지는 남한과 같은 농지개혁을 실시하여 주인에게 돌려주겠다고 밝히고 있다.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북한지역 도지사를 북한주민의 직접선거로 뽑겠다‘는 공약이다.
    이것은 유엔사령부, 즉 미국정부에 대한 정면 도전장이었다.
    맥아더의 38선 돌파를 승인한 미국은 육군성 주도로 북한 점령대책으로 ‘유엔군의 북한지역 점령지 통치지침( The Directive for Military Government)를 만들어 맥아더 사령부에 보냈다.
    이 지침을 미국은 유엔의 38선돌파 승인 결의안에 끼워넣어 유엔서도 통과 시키게 했다.
    북한통치지침은 3단계로서 1) 유엔군이 치안확보. 2) 유엔사령부가 북한 선거 준비. 3) 유엔 감시하에 선거를 실시하여 정부를 구성하고 점차적으로 통치권을 이양하겠다는 것이다.
    이때 한국정부는 북한정권 해체작업에도 배제시키고 일체의 행정기구 설립을 금지시켰다..

    이승만은 불같이 화를 내었다. 어이가 없고 기가막힐 노릇이다.
    “이 나라가 누구 땅이오? 또 미국이 군정을 실시할 참이오? 당장 취소하시오.
    북한의 모든 행정과 통치는 무리가 맡을 것이니 미국은 손을 떼시오.“
    맥아더는 이승만의 흥분이 갈아앉기를 기다려 트루먼에게 이승만의 뜻을 전달하였다.
    진작부터 북한 5도의 도지사를 임명해두고 통일한국 큰그림을 그리던 이승만은
    유시를 통하여 재삼 공개적으로 “북한 통치는 북한주민이 뽑은 대표들에게 맡긴다”고
    못을 박았던 것이다. 전쟁중에 또 미국과 싸워야 하는 이승만이다.
    해방후 건국때도 그랬고 2년후 부산정치파동, 그 다음해 한미동맹이 그럴 운명이었다.

    10월26일 3사단이 전해주는 압록강 물을 만져본 이승만은 원산을 방문하여 연설을 했다.
    다음주 29일엔 벼르고 벼르던 평양행에 나섰다. 맥아더 동행도 없이 혼자 서둘렀다.
    미군측이 평양방문 동의를 차일피일 미루었기 때문이다.
    아침 일찍 여의도 비행장으로 나간 이승만은 미군용 특별기에 올라탔다.
    그날 평양 시청 앞에 몰려든 평양시민들을 울린 연설문을 들어보자.

  • 1950. 10.31일자 조선일보 2면

    이대통령 평양 방문
    감개 더욱 무량히....39년동안 그리든 곳에

    [평양에서 대한통신 특파원] 이(李)대통령은 29일 오전 8시35분 미군 항공장교 2명이 조종하는 C-47 미군 특별비행기로 그간 해외풍상 39여년간의 망명생활에서나 또한 4278년10월 환국한
    이래 몽매간에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던 잃었던 우리의 국토 일부 북한 줌심도시 평양을 향하야 역사적인 여도에 올랐다.
    29일 오전 8시 35분! 이대통령 일행을 실은 특별 비행기는 폭음도 경쾌하게 여의도 비행장을 이륙, 비행장 상공을 일주한 뒤 기수를 북으로 돌려 일로 북으로 북으로. 오전 8시 45분 개성을 지난 비행기는 과거 5년간 우리 자유한국의 허리를 끊어 자의로 동포를 괴롭히며 갖은 비극과 민족적 악몽에 우리를 사로잡았던 마의 적경(赤境) 38선을 뚫고 일로 북한으로 돌진하였다. 기자는 폭음 관계로 “각하의 심경은 어떠하십니까?” 하고 서면 질의를 제출하엿더니 
    각하께서는 친히 붓을 들어 다음과 같이 그 감상을 적어주셨다.
    “본인이 평양을 방문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39년전인 1911년이었다. 
    이제 39년만에 처음으로 평양을 방문하게 되니 감개무량하며 기뿌다.
    그보다도 세계정복만을 일삼는 외세에 의하야 과거 5년간 분단되었든 
    우리 조국이 다시 통일 되니 더 한층 기뿌다.
    이때 우리는 유엔의 지원을 얻어 다시 통일되었는바 어떠한 나라일지라도 
    우리가 모든 문명국가와 힘을 합하야 나가는 이상 다시 우리나라를 분단함은
    허용되지 않을 것이다. 모든 문명국가는 반드시 우리와 함께 나갈 것이다“

    우리 일행이 무한한 감개에 싸여 아름다운 조국산천초목을 바라보는 동안에도 비행기는
    시속 160 마일의 속도로 비행하야 어느 듯 대동강을 지나 평양시 일각에 기수를 들여놓았다.
    우리기가 밟은 코스는 서울서 개성까지는 북으로 직행, 개성서부터는 약간 서북방향을 취하야 재령 사리원 황주를 거쳐 대동강을 건너 평양에 이른 것이다.
    오전 9시30분 비행기는 약 150마일의 양도시간 거리를 불과 55분 밖에 안걸려서 평양 비행장에 도착하였다.
    단기 4283년(1950) 10월29일 오전 9시30분 역사적인 평양 입성의 제일보를 들여놓으신 이대통령 각하께서는 비행기 앞에서 조종사도 포함하야 일행과 기념촬영을 하신 뒤에 아군 제O군단장 백(白) 준장(평양 제1착돌입 맹장)등 제장성들의 인사를 받으신후 그 노고와 분투를 치하하셨다. 이어 대통령 각하께서는 미군과 아국군 의장병이 전후로 보위하는 가운데 찦차로
    한때는 피로 물드렀든 대동강을 건너 소위 김일성대학촌을 보시면서 대동강변을 지나
    기림리를 거쳐 소위 쏘련 위성국가 수도였던 평양을 아국군과 유엔군이 연도에 도열한 가운데
    일보일보 입성하시었다. 
    평양 시청에 이르는 연도에는 피난갔다가 돌아오는 짐을 진 주민들도 포함한 시민 다수가 손에 태극리를 휘날리며 이날의 세기적인 대통령 방문을 만세소리도 우렁차게 환영하였으며
    거리에는 ‘대한민국 국부 이대통령 만세’ 등 대통령을 한영하는 프랑카드와 아치 문이 처처에 보였다. 오전 10시 대통령 각하께서는 과거 5년간 김일성 도당이 선량한 민중을 억압하고 쏘련에의 예속을 위하여 온갖 혹독한 짓을 다해 오던 살인 방화의 마전 이었든 지금은 평양시의 새살림집이 된 평양 시청에 무사히 도착하시었다.

    39년만의 평양...환호성 천지를 진동

    평양시에 무사히 역사적인 제일보를 드딘 이대통령은 평양시청에서 박현숙 권옥희 양씨의 인사를 받은 다음 평양시 관리위원회 위원장 임정득씨를 비롯하야 부위원장들을 인견하고 간단히 시 운영상황을 청취한 뒤에 그들을 치하하면서 앞으로도 성심성의 노력하라는 부탁을 하였다. 그리고 이어 미국 임시민정관 벨파이어 대좌와 힐 중좌도 인견하고 위무한 다음 약 5만여명에 달하는 운집한 시민들의 열광적 환호리에 발코니에 나섰다.

    “맹세하자 민주 쟁취를”
    이대통령 환영대회서 유시

    조국이 일제기반으로부터 광복된 지 5년동안 그리고 그리웠던 이대통령을 처음 맞이하는 시민들의 환호성은...(판독불가)....태극기의 바다로 화하였으며 오랫동안 간판을 내걸지 못하였든 조만식 선생이 영도한 조선민주당을 비롯하야 서북의용대 학생단체들....(판독불가)....
    이날 식은 먼저 주악대의 대통령 환영주악.....(판독불가)......대통령을 처음 모시고 애국가를 봉창하는 평양 시민의 제창소리는 온천지를 울릴만큼 웅장하고도...(판독불가)..한복의 대통령은 마이크를 손에 들고 감개무량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약 한시간에 걸쳐 간곡한 인사말씀과 유시를 하시었다.
  • 국군이 탈환한 평양을 방문, 시청 앞 5만 군중에게 연설하는 이승만 대통령(자료사진)
    ▲ 국군이 탈환한 평양을 방문, 시청 앞 5만 군중에게 연설하는 이승만 대통령(자료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