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장군(老將軍) 백선엽 대장과 전쟁영웅 심일 소령을 더 이상 폄하하지 말라!

    남 정옥 (6.25전사연구가, 문학박사)
  •   백선엽(1920∼, 현재 97세) 장군은 6․25전쟁영웅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의 4성장군인 대장(大將)계급에 오른 군의 첫 번째 가는 대원로(大元老)이다. 미군들은 그런 백선엽 장군을 ‘살아있는 전설’로 부르면서, 존경을 넘어 추앙(推仰)하고 있다. 한미연합군사령관들도 한국에 부임하면 제일먼저 백선엽 장군에게 달려가 가르침을 받는다.
    미군들에게 대선배이자 신화적 존재인 맥아더 원수를 비롯하여 워커, 리지웨이, 밴플리트, 테일러 장군과 함께 전선을 누볐던 백장군에게 무한한 존경심을 표한다.
    미군들은 백장군이 전투를 잘해서 뿐만 아니라 전역 후에도 한미동맹을 위해 꾸준히 노력했기 때문이다. 그런 백장군에 대해 주한미군은 ‘명예 미8군사령관’으로 추대했다. 미군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다. 
      백장군은 6·25때는 나라를 지켰고, 휴전 후에는 자신이 지켰던 나라를 위해 한미동맹에 헌신했다. 군복을 입든 안 입든 군과 국가를 위해 봉사했던 97세의 노장군이다. ‘나이 먹은 영원한 군인’인 셈이다. 백장군은 평생을 군인으로 살기를 원했고, 또 그렇게 살아왔다. 그에게 군은 바로 백장군, 그 자신이었다.  

      백선엽의 6․25때 전공은 헤아리기 어렵다.
    몇 사람이 해낼 몫을 그는 혼자서 거뜬히 해냈다. 제1차세계대전시 방어전의 백미(白眉)라고 일컫는 베르덩전투에 비견되는 낙동강전선의 다부동 전투에서부터 시작하여, 적도(敵都) 평양의 선두입성, 중공군 개입 후 유일하게 사단을 온전히 보존했던 유일한 국군 사단장, 1․4후퇴 이후 서울을 다시 탈환했던 사단장, 동해안 전선을 금강산 밑에까지 밀고 올라가 오늘날 동부전선의 휴전선을 형성케 했던 군단장으로 맹활약했다.
    그리고 휴전협상 시에는 한국군을 대신해 유엔군휴전회담 초대 대표를 지내며 대한민국의 자존감을 한껏 높였던 지휘관이었다. 특히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 시대를 열게 했던 지리산지역의 빨치산을 완전 소탕했던 ‘백야전전투사령관’으로서의 활약으로 불안과 공포에 떨던 대한민국 후방지역을 안정시켰던 공비토벌사령관이었다. 
      이후에도 백선엽은 2군단장으로서 중부전선의 금성전투를 지휘하여 전선을 안정시켰고, 반공포로석방 후에는 중공군사령관 팽덕회(彭德懷)가 모택동의 지시를 받아 작심하고 계획한 ‘중공군 7·13공세’에 맞서, 당시 몸이 아파 지휘를 못하고 있던 2군단장 정일권 장군을 대신하여, 육군참모총장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직접 2군단을 지휘하며 중공군의 공세를 꺾고 그들이 노렸던 화천발전소를 지켜냈던 장군이었다. 당시 2군단장으로 몸져 누워있던 정일권 장군이 뒤늦게 그런 백선엽 장군에게 그때의 고마움을 표하면서, 그의 미담이 널리 알려지게 됐다.

      백선엽 장군은 스케일이 대단히 컸다. 그리고 언제나 군인의 기상이 넘쳐흘렀다.
    그의 사무실에는 그런 백장군의 도량과 군인으로서의 기개를 알 수 있는 액자가 2개 걸려 있다.
    하나는 “배를 삼킬만한 큰 고기는 작은 물에서 놀지 않는다”는 것이다. “탄주어불유지류(呑舟魚不遊支流)”이다. 백장군은 그만큼 포부가 컸고, 그 포부 속에서 군을 지휘했던 기개 높은 ‘대장군(大將軍)’이었다. 
      또 하나는 군인으로서의 기상이 깃든 글귀이다. ‘즐풍목우(櫛風沐雨)’이다. “바람으로 머리칼을 빗고, 빗물로 목욕을 한다”는 전형적인 야전군인의 모습을 표방한 글귀다. 백장군은 6·25전쟁 때 한국군 장성 중 송요찬 장군 등과 함께 한 번도 전선을 떠나지 않았던 참다운 ‘야전군인(野戰軍人)’이었다. 이른바 흔히 말하는 ‘책상머리 장군’이 아니었다. 부하들과 생사를 함께한 전선을 발로뛰는 지휘관이었다. 백장군은 6·25전쟁 때 한마디로 말해서 ‘즐풍목우’의 냄새가 가득한 군인의 삶을 살았던 대한민국 군인 중에서 몇 안 되는 ‘참 군인’이었다.  
      백선엽 장군의 경력을 보면, 그가 왜 대장군인지를 금방 수긍이 가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백장군은 29세에 사단장이 됐고, 31세에 군단장이 됐고, 32세에 육군참모총장이 됐다. 그리고 33세에 대한민국 최초의 육군대장으로 진급했던 입지전적(立志傳的)인 전쟁영웅이다.
     당시 군에서는 기리성 같은 선배장군들이 많았다. 정일권, 유재흥, 이종찬, 이응준, 김홍일, 김석원, 신태영, 손원일, 김정렬 장군 등등. 전쟁이 끝난 뒤에도 백장군은 16개 전투사단을 지휘하는 동양최대의 야전군사령관에 임명되어 야전군 육성에 노력했고, 1957년 다시 한 번 육군참모총장에 기용되어 오늘날 국군의 골격을 갖추는데 크게 공로를 끼친 대한민국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장군이다. 
      백장군은 그런 전공과 경력에도 불구하고 항상 겸손했다. 그리고 남을 먼저 생각하는 이타적(利他的)인 삶을 살았다. 정일권 장군의 분신이었던 강문봉 장군은 그의 연세대 박사학위논문에서 진급 경쟁관계에 있던 백장군에 대해 “자신에게는 누구보다 엄격하고, 남에게는 한없이 관대했던 장군”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백장군은 남의 말을 하지 않는 분으로 유명하다. 특히 남에 대한 험담은 질색이었다.
    정치적 배경도 학력도 없는 그가 대한민국 최고의 군인으로 될 수 있었던 것은, 뼈를 깎는 학구적 노력, 자신에 엄격하면서도 남에 대한 끝없는 배려와 관대함, 그리고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려는 고도의 책임의식이었다. 미8군사령관 리지웨이와 밴플리드 장군도 백장군을 시험하고, 또 시험하고, 그리고 또다시 시험해서 통과한 유일한 장군이 백선엽 장군이라며 최고의 야전지휘관으로 평가했던 것도 그의 따뜻한 인격과 조국에 대한 무한한 애국심, 그리고 무한한 책임의식에 감동했기 때문이다. 그런 백장군도 인생의 황혼기를 넘어 이제 ‘백수(白壽)’를 바라보고 있다. 늙었으나 기개가 살아 있는 ‘대호(大虎)’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최근 군의 원로이자 노장군인 백선엽 장군을 극히 폄하(貶下)하는 ‘어처구니없는 글’을 봤다. 예비역 준장 출신인 박경석이 2017년 7월 30일 경향신문에 〈‘만들어진 호국영웅’ 진실은 숨길 수 없다〉라는 기고문을 통해 백선엽 장군을 일방적으로 매도하고 있는 글을 뒤늦게 봤다. 박 장군의 기고문에 의하면, 전쟁영웅으로 알려진 심일 소령은 자신에 의해 1981년 자신이 위원장이 있는 공적심사위원회에서 이미 가짜로 밝혀졌다고 하면서, 심일 소령이 전쟁영웅으로 ‘둔갑’한 배경을 나름대로 설명하고 있다. 그의 기고문을 축약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어느 날 미국 유학동기인 손 장군이 와서, ‘월남전 영웅은 강재구소령이 있는데, 6.25전쟁 영웅이 없으니 함께 신화를 창조하자’고 하면서 자신을 백선엽 장군의 사무실로 끌고 갔다. 백장군은 자신(박경석)을 반갑게 맞이하면서 ‘손장군과 함께 6·25전쟁 호국영웅을 만들어 달라’는 말에 자신은 동의할 수 없다며 방을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보니 백장군이 육군에 압력을 넣어 이 문제를 해결했다고 한다. 지난해 6월 이대용 장군이 심일소령의 공적이 허위라고 다시 밝혔는데도 군사편찬연구소 자문위원장인 백선엽 장군을 업은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가 진실을 외면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심일 소령 호국영웅 정착화 알박기’에 광분하며 육군에 계속 압력을 넣고 있다. 육군군사연구소 한설 장군은 홀로 진실을 밝혀내려 국방부의 압력을 막고 불의와 싸우는 현대판 조선명사관(朝鮮名史官)이라며 ‘존경(?)’까지 표하고 있다.”

      박경석 장군의 기고문에는 허점이 많다. 혼자의 독백(獨白)이라면, 전혀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지면을 통해 만인이 그의 ‘거짓사실’을 접하게 됐다. 박 장군이 언급한 손 장군은 아마도 오래전에 작고하신 손희선 장군을 지칭한 것 같은데, 손 장군은 박장군이 소대장일 때 인접 연대장을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손 장군을 미국 유학을 같이 갔다고 해서 마치 같은 동년배의 유학동기생으로 표현한 것은 아무리 세월이 흘렀다 해도 ‘군의 예의’ 상 부적절한 표현이 아닌가 싶다. 군인정신이 충일한 박장군께서 옛 상관을 그렇게 표현해도 괜찮은 것인지!
      백선엽 장군은 모든 일에 신중한 분이다. 일에 경중(輕重)이 없이 함부로 결정을 내리는 분이 아니다. 그것은 6·25전쟁당시 총장에 임명될 때부터 몸에 밴 습관이었고, 이후 그에게는 거역할 수 없는 하나의 불문율이 됐다. 백장군은 6·25때 총장임명을 받고, 미8군사령관 밴플리트 장군을 찾아가 어떻게 하면 총장을 잘할 것인가를 물었다. 그때 밴플리트 장군은 “중요한 결정은 즉석에서 내리지 말고 하루 밤을 고민한 후에 내리라!”고 충고했다. 백장군은 밴플리트 장군의 이 말을 평생 자신이 지켜야 할 신조로 여기고 행동했다.
    그런데 박장군의 주장처럼 “손 장군이 심일 소령을 영웅으로 만든다고 해서, 백장군이 그런 문제를 갖고 육군에 압력을 넣었겠는가를 생각하면 백장군의 곧은 성정(性情)과 업무스타일에 비추어볼 때, 어불성설이라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다. 
      백장군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면, 백장군이 얼마나 언행에 신중한 분이라는 것을 잘 알 것이다. 이미 32세에 총장을 지냈고, 1957년 다시 총장을 지냈던 백장군은 전역 후에도 육군의 정책이나 방향에 대해 군 수뇌부로부터 자문을 받았다. 그럴 때도 백장군은 함부로 나서지 않았다. 혹여 자신의 조언이 육군의 나아갈 방향에 누가 될까봐서다. 마지못해 육군총장이 자문을 구할 때에야 비로소 ‘겸연쩍게 그리고 조심스럽게’ 나서는 분이 바로 백장군이다.
    백장군의 사전에 ‘압력’이라는 단어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손장군이나 박장군이 백장군을 찾아와서 심일 소령과 같은 그런 문제를 논할 위치도 아니고, 백장군이 거기에 시시콜콜하게 응대할 분도 아니다. 
      박장군은 경향신문에 낸 기고문에서 자신을 대단히 높게 평가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치 백장군과 막역한 사이인 것처럼, 또 백장군과 대등한 관계처럼 말이다. 그리고 마치 심일 소령 같은 육군의 문제를 논의할 상대인 것처럼 묘사하고 있으나, 그것은 박장군이 그렇게 됐으면 하는 희망사항이 아닌가 싶다.
    백장군이 무엇 때문에 그런 문제를 박장군과 논의한단 말인가. 백장군은 보다 큰 국가차원의 안보문제, 육군이 나아갈 대계(大計)와 같은 보다 큰 차원의 문제에 대해서 보다 비중 있는 군 원로들과 대화를 나누지, 백장군이 총장할 때 소대장 정도였던 사람과 그런 문제를 논의하면서 그것도 ‘동의’를 구한다는 말은 들어보지도 못했다. 백장군이 무엇이 아쉬워서 박장군 같은 분에게 육군문제를 놓고 동의를 구하며 압력을 가한단 말인가. 당치도 않은 말이다.   
      그리고 박장군은 군의 원로이자 상관이었던 백장군을 왜 그렇게 ‘쪼잔하게’ 표현하는가! 옛말에 아는 것만큼 보이고, 보이는 것만큼만 안다고 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배후에서 마치 백장군이 압력을 행사하여 심일 소령을 전쟁영웅으로 만드는데 백장군이 ‘알박기’를 했다고 하는데, 박장군은 대체 무슨 생각에서 그런 말을 했는지, 그 속내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한때 ‘한사랑(韓史郞)’으로 필명을 날렸던 ‘박장군’은 어디로 갔는가! 거기에 덧붙여 최초 ‘심일 소령의 공적이 가짜’라고 문제를 제기했던 ‘압록강 초산의 영웅’ 이대용 장군은 왜 그렇게 심일 소령의 가짜공적 만들기에 기를 쓰는가! 이대용 장군의 “나라를 위해 죽은 죄 밖에 없는 후배 심일 소령 때리기”에 그저 말문이 막힐 뿐이다.
      영웅부재의 대한민국에서 그나마 미군에 의해 영웅대접을 받고 있는 백선엽 장군을 ‘무고(誣告)’에 가까운 말로 표현해도 좋은지 박장군에게 묻고 싶다. 박장군은 그렇게 말하려면 1981년 자신이 위원장을 맡았다고 한 심일 소령의 공적진위를 가리기 위해 구성된 ‘공적조사위원회’ 실체와 심일 소령이 가짜라고 밝힌 문서, 그리고 백장군이 압력을 행사했다는 증거를 공개해야 한다.  
      1981년 정치적 혼란상황에 빗대어 얼버무리려는 ‘꼼수’ 대신, 만인이 공감할 확실한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 그럴 자신이 없다면 “증거도 없고 실체도 없는 오로지 자신만 알고 있는 이야기”를 더 이상 양산하여 퍼뜨리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육군군사연구소는 왜 그렇게 싸고도는가! 육군군사연구소장을 ‘조선명사관’이라고 했는데, 그 분의 무엇을 보고 그렇게 말하는지, 그 저의가 자못 의심스럽기만 하다. 박장군이 말하는 조선의 명사관의 기준이 무엇인지? 그의 행동이 어떠하기에 명사관이라고 하는지? 박장군도 이제 ‘총기(聰氣)’가 흐려지지 않았는가 싶다.   
      심일 소령의 ‘가짜공적’과 관련하여 이대용 장군, 박경석 장군, 그리고 육군군사연구소는 하나의 잘못된 공통점이 있다. 증거가 될 말한 확실한 자료는 제시하지 못한 채, 심일 소령의 전투현장에 없던 자들과 관계없는 ‘증언자’들의 ‘증언’만 마치 ‘진실’인양 되풀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달을 가리키는데, 달을 보지 않고 손가락을 쳐다보는 격”이나 마찬가지다. 

      거기다 확실한 증거를 갖고 있는 분들도 모두 타계했다는 점이다. 왜 그들이 모두 죽은 뒤에야 마치 자신만이 역사의 진실을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지 알 수 없다.
     박경석 장군이 말한 손희선 장군도 작고했고, 당시 인사참모부장 김홍한 장군도 작고했고, 심일 소령의 직속상관 7연대장 임부택 장군도 전사했고, 6사단장 김종오 장군도 작고했다. 확실한 증인이 될 수 있는 사람은 모두 죽었다. 그들이 채택하고 있는 심일 소령의 공적에 대해 증언할 수 있는 사람은 이제 이 세상에 없다. 그런데도 그들은 증언자로서 자격이 없는 자들의 증언을 내밀며 믿으라고 강요하고 있다. 그것도 국가기록은 전혀 믿지 않고, 심지어는 국가기록을 ‘날조’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박경석 장군, 이대용 장군, 육군군사연구소는 각성해야 한다. 국가기록은 믿지 않고, 얼토당토 않는 증언자로서 도저히 채택할 수 없는 자들의 말만 믿고, 심일 소령의 공적을 가짜로 몰아붙이는 ‘반역사적 행위’는 이제 이쯤에서 멈춰야 할 것이다. 심일 소령의 공적이 가짜라고 하는 것은, 마치 ‘고추달린 사내아이를 남자’임을 증명하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 누군가가 그 사내아이를 남자가 아니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과연 사내아이가 아닐 수 있겠는가! 국가기록원의 태극무공훈장부나 당시 태극무공훈장 심의 국무회의록, 그리고 미 은성무공훈장 공적서를 믿지 않는 것은, 마치 ‘고추 달린 사내아이의 고추를, 고추가 아니기 때문에 남자가 아니라고 한 것’과 매한가지다. 
      여기서 박경석 장군과 이대용 장군 그리고 육군군사연구소에 감히 고한다. 을지문덕 장군이 수나라 장수 우중문에게 보낸 시에서 충고했던 것처럼, 심일 소령의 가짜공적 만들기의 의도가 궁극적으로 무엇을 뜻 한지 잘 모르겠으나. “이제 그 정도면 됐으니, 이제 이쯤에서 그만두기를 바랄 뿐”이다.

    심일 소령은 적진에 들어가 싸우면서 태극무공훈장을 달라고 하지도 않았고, 죽으면서 전쟁영웅으로 만들어 달라고 요구하지도 않았다. 심일 소령은 오로지 군인으로서 조국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동작동에 묻힌 호국영령들처럼 조국의 산하에서 산화했을 뿐이다. 목숨을 내던진 채 적진으로 들어가 특공대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온 후배인 심일 중위를 보고 도망갔다고 하면 되겠는가! 그리고 국무회의를 거쳐 대통령 재가를 받아 수여한 태극무공훈장을 받은 영웅을 가짜라고 하면 되겠는가! 심일 소령에게 죄가 있다면 오로지 나라를 위해 죽은 ‘죄’밖에 없다. 그것이 ‘죄’라면 단죄하라! 아마 심일 소령은 그것마저도 달게 받지 않을까 싶다.   

      또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심일 소령과 무관한 군의 대원로(大元老)이자 전쟁영웅 백선엽 대장을 우격다짐 식으로 ‘심일 소령의 가짜공적’에 ‘공범’으로 짜 맞추는 것은 또 무슨 까닭인가! 백선엽 장군은 평생을 군인으로 살다가, 6·25를 만나서는 가족의 생사도 모른 채, 나라를 위해 열심히 싸웠고, 전란의 와중에서도 이승만 대통령을 도와 국군을 오늘날의 60만 대군으로 만든 ‘죄’밖에 없다. 그것도 안심이 되지 않아 전쟁이 끝난 다음에는 노구를 이끌고 과거 군 시절 인연을 맺었던 미군 장성들과 교분을 나누며 한미동맹에 일조한 ‘죄’밖에 없다. 

      전쟁영웅 부재의 대한민국에서 ‘있을까 말까한 영웅’마저 이렇게 흠집 내고, 저렇게 흠집 내서 무엇을, 어떻게 하겠단 말인가! 자신들의 ‘소영웅심’이 동작동에 묻힌 호국영령들에게 얼마나 누가 되고, 국군사에 얼마나 큰 상처가 되며, 155마일 휴전선에서 나라를 지키는 국군장병들의 사기를 얼마나 떨어뜨리는 일인지를 한번이라도 생각해봤다면, 그렇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한때나마 존경했던 이대용 장군님, 박경석 장군님, 한설 장군님, 군인의 본분을 하루빨리 되찾기를 간곡히 부탁드린다. 사랑하는 조국과 군을 위하는 충정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