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1974년 포드 美대통령에 비밀회담 제안, 김정일 1994년 美와 제네바 합의
  • 탄도미사일 시험 발사를 앞두고 떠드는 김정은. ⓒ北선전매체 화면캡쳐.
    ▲ 탄도미사일 시험 발사를 앞두고 떠드는 김정은. ⓒ北선전매체 화면캡쳐.


    김정은이 지난 7일(현지시간) 독일 함부르크 G20 정상회담을 즈음에 전 세계 해외공관에 ‘美-北평화협정’을 맺을 수 있도록 노력하라는 비밀 지령을 내렸다고 日‘아사히 신문’이 지난 19일 보도했다.

    日‘아사히 신문’은 “북한 김정은이 독일 G20 정상회담이 열리던 시기, 각 재외공관에 긴급지령문을 보냈다”면서 “지령문에는 ‘미국을 압박해 美-北 평화회담에 응하도록 하라는 내용이 있었는데, 이는 남북대화를 제안한 문재인 정부와 미국 정부 간의 대북전략 갈등을 파고 들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日‘아사히 신문’은 “김정은의 지령문에는, 지난 4일 발사에 성공한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 ‘화성-14형’을 앞세워 ‘북한에게 핵무기 보유를 포기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도록 유도하고 압박해 대화에 끌고 나오라는 내용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日‘아사히 신문’에 따르면, 김정은은 지령문을 통해 “이번 기회에 美-北평화협정 체결을 반드시 실현해야 한다”고 지시하며 “남조선에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것은 우리에게 절호의 기회이므로, 적대 세력들이 떠들고 나서기 전에 우리의 통일 과업을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日‘아사히 신문’은 “지난 14일 北외무성 대변인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화성-14형의 발사를 두고 추가제재를 결의한다면, 우리는 그 후속 조치를 취할 것’이라며, 새로운 탄도미사일 시험 발사나 핵실험 가능성을 내비친 바 있다”고 지적했다.

    日‘아사히 신문’은 “지난 9일 北‘노동신문’이 ‘문재인 대통령의 방미는 조선반도 평화통일과 남북관계 개선을 열망하는 동포들에 대한 도전이고, 친미 굴종의 망동’이라고 비난한 것은 남북 대화를 추진하려는 문재인 정부와 미국 정부를 이간질하려는 시도로, 김정은이 재외공관에 보낸 비밀 지령문과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고 분석했다.

  • 북한이 지난 4일 발사한 ICBM급 탄도미사일 '화성-14형'. ⓒ北선전매체 화면캡쳐.
    ▲ 북한이 지난 4일 발사한 ICBM급 탄도미사일 '화성-14형'. ⓒ北선전매체 화면캡쳐.


    日‘아사히 신문’의 보도는 북한이 김일성 시대 때부터 추진해 오던 대남적화통일 전략, 그 중에서도 ‘통미봉남’ 전략은 그대로 살아 있음을 보여준다.

    북한 김일성은 6.25전쟁이 끝난 뒤 “핵무기가 없어 미국에게 졌다”고 생각해 소련과 중공을 찾아다니며 핵무기 기술 제공을 구걸하고 다녔다. 그러나 당시 소련과 중공 모두 “그 작은 나라에 핵무기가 왜 필요하냐”며 거절했다.

    김일성은 이후 자체 핵무기 및 탄도미사일 개발과 함께 “미국과 직접 대화해 남조선을 고립시키고, 미국과 불가침 조약(평화협정)을 맺어 주한미군을 철수시킨 뒤 한반도를 적화통일 한다”는 전략을 세워 추진한다. 김정일 또한 김일성이 내세운 ‘통미봉남’을 계승해 한국과의 대화는 건성으로 하고, 미국과 양자 회담을 하기 위해 애를 썼다. 이는 공개된 몇몇 비밀외교문서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2008년 12월 국내 언론들은 기밀해제가 된 美외교문서 내용을 보도했다. 1974년 8월 27일 미국을 방문한 루마니아 대통령의 특사 ‘바실 푼간’이 제럴드 포드 美대통령에게 “북한이 미국과의 비밀접촉을 원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고 한다. 이때 포드 美대통령은 “북한을 만나려면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다”며 거절했다고 한다.

    1975년 미국을 찾은 차우세스쿠 루마니아 대통령은 포드 美대통령에게 다시 한 번 “북한과 접촉해 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고, 미국은 재차 거절했다고 한다.

  • 1994년 10월 미국과 북한 간의 '제네바 핵합의' 서명 장면. ⓒKBS '제네바 합의 20주년' 관련보도 화면캡쳐.
    ▲ 1994년 10월 미국과 북한 간의 '제네바 핵합의' 서명 장면. ⓒKBS '제네바 합의 20주년' 관련보도 화면캡쳐.


    김정일 때의 ‘통미봉남’은 1991년 12월부터 1994년 10월까지 있었던 ‘한반도 핵위기’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1991년 12월 31일, 김정일은 한국에 배치된 주한미군의 전술 핵무기를 철수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한반도 비핵화 선언’에 합의한다. 1992년 1월 14일 남북한은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에 서명했고, 1월 31일 북한은 국제원자력에너지기구(IAEA)와 핵시설 사찰을 수용한다는 ‘핵안전협정’에 서명했다. 핵비확산조약(NPT)에도 가입했다.

    북한은 그러나 한국에서 주한미군 핵무기가 모두 철수한 뒤인 1993년 3월 12일 “IAEA의 영변 핵시설 사찰은 주권 침해”라며 영변 핵시설 사찰을 거부하고, NPT를 탈퇴한다. 1994년 6월 13일에는 IAEA까지 탈퇴한다. 한반도 핵 위기가 최고조에 달했다. 당시 북한의 실질적인 지배자는 김정일이었다.

    빌 클린턴 美대통령은 북한과의 대화가 불가능하다고 보고, 영변 핵시설과 북한군 지휘부 등에 대한 정밀 타격을 지시한다. 빌 클린턴 前대통령의 회고록에 따르면, 1994년 6월 15일 오전(현지시간) 美백악관에서는 북한과의 전면전까지 각오한 선제타격 작전에 대한 브리핑이 열리고 있었다고 한다. 브리핑 후 한국 내 美민간인 소개 작전(NEO)이 시행될 예정이었다고 한다.

    이때 북한을 찾아 김일성을 만났던 지미 카터 前대통령으로부터 연락이 와 대북 선제타격은 중단됐다고 한다. 이후 북한은 미국과의 양자 회담을 고집, 1994년 2월 18일 합의문을 만들어 냈다. 1994년 3월 1일을 기해 한미연합훈련 ‘팀 스피리트’ 중단, IAEA 사찰 수용, 남북 특사 교환, 3월 21일 美-北 양자 회담 개최 등의 내용을 담았다. 그러나 이 합의는 3월 19일 판문점 남북 회담에서 깨졌다. 이때부터 북한은 노골적으로 한국을 배제하기 시작했다.

    이후 한국 정부는 한반도 핵위기 해결에서 계속 ‘제3자’ 위치에 서 있었다. 북한은 미국과의 협의 끝에 1994년 10월 ‘제네바 합의’를 얻어낸다. ‘한반도 에너지 개발기구(KEDO)’를 통해 북한이 영변 핵시설을 폐쇄하고 핵무기 개발을 중단하는 대신 경수로 2기를 지어주고, 경수로가 완성되기 전까지는 매년 석유 50만 톤을 공급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비용은 70% 이상 한국이 부담했다.

  • 2016년 11월 15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美측과의 '반민반관 접촉'을 위해 中베이징 공항에 들른 최선희 北외무성 미주국장. ⓒ뉴시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2016년 11월 15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美측과의 '반민반관 접촉'을 위해 中베이징 공항에 들른 최선희 北외무성 미주국장. ⓒ뉴시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처럼 김일성과 김정일 때부터 시작된 ‘통미봉남’은 김정은 들어 더욱 노골화되고 있다.

    김정은은 한국 정부와의 대화는 거절하는 대신 2016년부터 전직 美정부 고위관료와 北외무성 관계자들 간의 '반민반관 접촉'을 계속 추진하고 있다.

    2014년 5월 몽골 울란바토르에서 미국과 북한 민간 측 접촉을 시작한 데 이어 2015년 1월 싱가포르, 2016년 10월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2016년 11월 스위스 제네바, 2017년 5월 노르웨이 오슬로 등에서 최선희 北외무성 미주국장과 美씽크탱크 관계자들이 만나 한반도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를 두고 한국과 미국 내에서는 "미국과 북한 간의 직접 대화가 이뤄지는 것 아니냐"는 성급한 관측이 나오기도 했다.

    김일성·김정일 때와 달리 핵무기에다 ICBM 등 탄도미사일까지 가진 김정은은 이를 앞세워 위협하면, 여론에 민감한 美정치권과 미국인들을 계속 자극해 ‘통미봉남’을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