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직해야 할 것은 세월호의 죽음이 아니라 추모다
  • 잊지 못하는 장면이 있다. 2014년 10월의 마지막 밤, 이미 세월호 광장으로 변해버란 광화문 광장을 지날 때의 일이다. 한 남성이 노랑 리본 모양으로 제작된 머플러 안으로 머리를 쑥 밀어 넣는 장면이다. (그러니까 고리 안에 머리를 끼는 형식) 내가 놀란 포인트는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죽음을 발 빠르게 상품화하는 좌파들의 능력이었고, 둘째는 이 세월호 농성을 겨우내 이어갈 것이라는 단호한 의지의 확인이었다.

    우리 사회에 집단적 충격과 트라우마를 남긴 세월호 참사. 이 사고는 대한민국의 안전불감증을 재점검하고 서로의 상처 입은 마음을 다독이는 방향이 아닌, 증오와 슬픔, 그리고 분노를 조장하는 분열의 블랙홀이 돼 버린 지 오래다.

    300명의 못다 핀 죽음은 사건 발생 직후부터 정부를 흔드는 정치 도구로 이용됐다. 유가족 대표단에 유족이 아닌 좌익 정당 활동가가 끼어있는가 하면 국정원 대선 개입 진상규명을 외치며 18대 대선 불복종 운동을 벌이던 각종 좌익 단체들이 세월호 진상 규명 단체로 탈바꿈해 기승했다. 내란선동죄 이석기(舊 통합진보당 소속 국회의원)의 구속과 함께 지리멸렬하게 소멸해가던 한국대학생연합(전대협-한총련의 후신) 역시 세월호 참사라는 그들만의 대목을 맞아 굴기했다.

    그로부터 3년이 흘렀다. 조용히 사그라드는 듯 했던 ‘세월호 참사 추모 빙자 농성’은, 박근혜 대통령 탄핵 정국을 맞아 휘발유를 부은 듯 다시 타올랐다. 그리고 그 화마는 처음 태동했을 때의 목적대로 대통령을 끌어내리는 데 중요한 축으로 기능했다.

    그래서일까. 유력 야권 대선 주자는 박 대통령 인용이 결정된 직후 팽목항을 찾았다. 그곳에서 그가 남긴 말은 놀랍게도 “고맙다. 얘들아” 였다. 대체 뭐가 고맙다는 것일까,

    죽음의 정치화와 동시에 진행된 것은 죽음의 계급화이다. 죽음에 의미가 부여된 것이다. 이로써 어떤 죽음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될 죽음, 어떤 죽음은 ‘내 알바야?’ 하는 죽음이 됐다. 죽음을 이용하고, 죽음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공산·전체주의 진영의 오래된 수법이다.

    1945년-1948년의 해방정국 동안 좌익인사들이 일으킨 폭동 중 하나인 대구 10월 폭동. 이들이 대중을 폭동에 동참시킨 방식은 이른바 ‘시체 팔이’ 였다. 폭동 주동자들은 대구의대 시체 영안실에서 콜레라에 전염 돼 죽은 한구의 시체를 꺼내온다. 그리도 외친다. “여러분! 경찰이 선량한 시민을 폭행해 죽였어요!”

    여기에 선동된 시민들은 빠르게 폭도로 변했다. 이 폭동으로 경찰 수십명과 가진 자들, 우익 인사들이 잔인하게 살해당했다. 작년에 세상을 떠난 고(故) 백남기 씨 사건의 경우, 대구 10월 폭동의 잔영을 엿볼 수 있다. 소위 추모꾼들이 부검을 하지 못하게 막은 저의가 의심스럽다. 정말로 그들이 주장하는 대로 고인의 죽음이 경찰의 강경진압에 의한 것이라면 앞장서서 부검을 요청하는 것이 일반 상식이다.

    그리고 드디어 죽음은 ‘패션’이 됐다. 진품 노랑 리본, 세월호 머그컵, 세월호 우산, 세월호 머플러, 세월호 휴대폰 케이스···.

    요즘 들어 볼 수 있는 몇몇 괴상한 장면 중 하나는 노랑 리본 휴대폰 케이스를 장착한, 100만원을 호가하는 최신형 휴대폰 자판 위를 번쩍 거리는 네일 아트로 장식한 손톱이 정신없이 움직이는 모습이다. 혹은 프라다, 루이뷔통과 같은 소위 명품 가방에 달랑달랑 매달려 있는 노랑 리본이라든지.

    노랑리본은, 그러니까 노랑리본으로 되살아난 세월호는 추모의 상징에서 자신의 정치성향을 드러내는 패션의 도구가 됐다. 그것도 딱 명품 가방에 달랑 달랑 매달고 다닐 만큼의 알량한 깊이로.
    이 노랑리본족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첫 번째 부류는 노랑리본이라는 ‘정의’와 ‘민주주의’를 장착함으로써 ‘나 이렇게 사회 현상에 관심있고 깨인 시민이야!’ 하는 것을 드러내고 싶어하는 이른바 관심 종자다. 어떤 면에서는 前者가 차라리 낫다. 정말로 그저 패션이기 때문이다.

    다른 부류는 세월호 참사로 인해 정치 현실에 관심을 갖게된, 그러나 한 쪽이 보여주는 왜곡된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들이 보여주는 세상에 함몰된 부류다. 주로 한 번도 죽음을 경험해보지 못한 순박한 어린 아이들이다. 후자가 더 안타까운 이유는 소수지만 진성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세월호 참사와 그 참사가 양산한 가짜 정보를 통해 정말로 단원고 아이들이 어떠한 음모에 의해 계획적으로 살해당했다고 생각한다. 분노를 조장하는 꾼들이 계급화 해놓은 죽음을, 여과 없이 받아들이는 것도 이들이다.

    이 분노 조장꾼들은 세월호 참사로 인해 수많은 이익을 창출하고 사회적 지위가 상승했으며, 적대시 여기는 세력을 결국은 쳐내는데 성공한 ‘죽음 팔이’가 자신들의 본질임을 결코 드러내지 않는다.

    “세월호 팔이가 지겹다”는 솔직한 말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 솔직히 지겹다.

    그리고 드는 생각은 국민 다수로 하여금 300명의 그 불쌍한 아이들의 죽음을 지겹게 만든 주체는 어느 누구도 아닌, 세월호 진상규명을 외치며 지난 3년간 광장에서 군림한 세월호 정치꾼들이라는 사실이다. 이들은 어른으로서의 자격이 없다. 나쁜 어른들이다.

    어느 누구도, 유가족과, 세월호 참사의 충격에서 아직도 헤어나오지 못하고 계신 분들에게 ‘추모 중단’을 요구한 적이 없다.

    나 역시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을 위해 기도하곤 한다. 하지만 계속 추모를 이어가는 것과 국민 전체에게 슬픔과 분노를 강요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인간의 생명이 평등한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죽음은 평등하다. 죽음의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죽음에 경중이 나뉘게 된다. 죽음의 계급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계급화는 '적대 세력의 생명은 하찮은 것' 이라는 공산주의의 그것으로 이어진다.

    어느 죽음이든 자연사가 아닌 이상 이해하지 못할 우연과 아쉬움이 얽히고 섥혀 있다. ‘이랬다면 혹은 저랬다면’ 하는 것들이.

    우리 모두 그런 죽음을 각자의 사연으로 가슴에 묻고 살아간다. 소리쳐 외치는 슬픔만이 슬픔은 아니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노랑리본을 달고 다니는 대부분의 아이들의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경험해보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으로 겪게 되는 슬픔과 현실 부정 그리고 이해의 단계를 경험해보지 못한 아이들이다.

    어른의 자세는 끝없이 분노와 증오를 내뿜으며 악다구니 쓰는 모습을 연출하는 것이 아니라, 상처 입은 마음을 서로 다독여주는 모습이어야 했다.

    3년이 지났다. 곧 새 정권도 들어선다. 세월호가 함의하는 바가 더 이상 각종 음모론과 증오의 상징이 아닌, 우리 사회의 안전을 점검하고 보다 성숙한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