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왜, '북한인권재단' 출범을 가로막고 있는가"

  • 바야흐로 작금의 한국사회는 ‘격동의 시기’라는 표현 외에는 더 적절한 표현은 찾을 수 없어 보인다.
    미-중 두 강국이 북한 핵문제를 주요의제로 하여 정상회담을 하고, 전시에나 볼 수 있을 법한 미국의 전략자산에 대한 뉴스가 연일 한반도를 달구고 있다.

    거기에 더해 전대미문의 대통령 탄핵과 그에 따른 조기대선이 안보이념을 한가운데 놓고 벌어지고 있다.
    이른바 송민순 전 외교장관으로부터 촉발된 ‘유엔인권결의안에 대한 사전 북한 의견 질의’건이다.
    노무현 정부 당시 비서실장이었던 문제인 대통령 후보에게 던져진 ‘거짓말’이라는 공격과 ‘북풍’, ‘해묵은 색깔론’이라며 항변하는 선거판 논쟁이 그것이다.

  • 필자를 비롯한 많은 국민들은 당시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한 유엔결의에 모든 국제사회가 단호히 찬성하는데 당사자인 우리는 왜 기권했는가.’ 하는 의구심을 강하게 가졌었다.
    또 있었다.
    ‘미국 일본 등 우리의 우방국가들은 북한인권 참상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면서 각각 2004년과 2006년 북한인권법을 제정하였는데 정작 당사국인 한국의 국회에서는 2005년 발의된 북한인권법이 우여곡절 끝에 11년 만에야 통과된 것도 마찬가지다.
    OECD가입국인 우리나라로서는 참으로 국제사회에 민망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북한인권의 문제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법은 통과 되었지만, 실제 사업을 진행하여야할 법정기구인 ‘북한인권재단’이 예산만 배정된 채로 출범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북한인권문제가 왜 이토록 방치되고 ’북풍‘과 ’색깔론‘이라는 정치헤게모니에 갇혀 있는 것인가.
    인류 최악의 인권침해가 한반도의 북쪽에서 지금도 정권에 의해 조직적이고도 광범위하게 벌어지고 있는데 남의 일처럼 방관하는 일들이 어째서 일어나는가?

    시계를 당시로 돌려보자.

    유엔의 북한인권결의안을 외면하던 노무현 정부의 속마음

    노무현 정부는 2007년 11월 21일 유엔 총회 제3위원회의 북한인권결의안 표결에 기권하였다.
    투표에 앞서 북한당국에 의견을 물었는지 여부를 두고 지금 진실공방이 한창이다.
    당시 청와대 외교안보정책협의에서 이재정, 김만복, 백종천이 결의안에 기권하자고 주장했고, 송민순이 찬성투표해야 한다고 반발하여 결론이 나지 않았다.
    이에 문재인 비서실장이 안기부를 통해 북한의 의견을 묻기로 했다는 것이다.

    송민순은 외교부 미주국장시절 주한미군지위협정 개정교섭에서 한국의 재판관할권을 확대하려는 입장으로 미국대표를 힘들게 하였지만, 장기적으로는 한미 양국에 도움이 되는 결과를 만들어 낸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북한인권결의안 관련 진실공방은 그 당시 기록을 확인하면 곧 밝혀질 것이다.

    진실공방과 상관없이, 유엔의 북한인권결의안에 대한 노무현정부의 기권 투표는 국제사회의 웃음거리가 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 1990년 고난의 행군시기 대량 탈북사태가 일어났고, 이들 탈북자들의 증언을 통해 강제수용소, 성분 제도를 포함하여 북한정권에 의한 조직적이고도 광범위한 인권침해실태가 적나라하게 밝혀졌다.
    북한인권시민연합, 휴먼라이츠워치와 같은 NGO들이 이 증언들을 정리하여 공론화 운동을 하였다.
    결국 유엔의 인권보호체제가 북한을 수단, 시리아와 같은 지구상 가장 열악한 인권침해국가로 지정하여 개선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이러한 국제적 노력에 대하여 막상 한국 정부는 남의 일처럼 외면하였다.
    정확하게 햇볕정책 기간과 일치하는 시기였다. 북한주민의 참혹한 인권침해는 외면하고 북한정권의 눈치를 본 것이다.
    근대 민주주의 역사에서 좌파들이 인권문제를 주도한 선례와는 정반대의 현상이다.

    2003년부터 유엔 인권위원회에 제기된 북한인권 결의안을 다루는데 한국정부는 표결에 불참하거나 기권을 하였다.
    그 당시 정부 내 논의과정에서 인권의 보편성이나 상식을 기반으로 하여 결의안에 찬성하여야 한다는 의견이 다수였음에도 불구하고, 소위 '내재적 접근론'자가 주도하여 기권하도록 결론지었다.
    2003년부터 2004년, 2005년 인권위원회 결의안 투표에 기권을 하였다.
    북한정권이 이들 결의안에 반발하고 개선의지를 전혀 보이지 않자, 2005년에는 차원을 높여 유엔총회에서 논의하였고, 한국은 유엔총회 결의안에도 기권하였다.

    2006년 11월 유엔총회(제3위원회)의 북한인권결의안에 노무현 정부가 찬성한 예외는 바로 한 달 전 10월 9일 북한이 1차 핵실험을 감행한 직후라서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문제의 2007년 11월 21일 유엔총회(제3위원회)에서의 북한인권결의안에 찬성할 것인가 아니면 기권할 것인가는 정부 내에서도 논의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송민순의 외교부는 국제외교가에서의 창피를 면하기 위해서도 2006년과 같이 찬성하고 싶었고, 다른 인사들은 북한정권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기권 입장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이다.


  • 미국 의회가 북한인권법안을 심의하던 시기인 2004년 9월 2일 열린우리당 의원 25명은 미국의 북한인권법 제정에 반대하는 서한을 주한 미국대사관에 전달하기도 하였다.
    2006년 4월 18일 통일부 차관은 북한인권NGO들의 활동이 북한인권개선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발언하였다.
    당시 노무현 정부가 북한인권문제의 거론 자체를 회피하려던 시기에 일어난 창피스런 기록들이다.

    문재인 대표가 노무현 대통령의 비서실장이었을 당시인 2007년 유엔북한인권결의안에 대한 북한측 입장을 확인하자는 입장은 당시 정부의 정책결정자들 마음속에 북한정권을 어렵게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웅변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북한주민의 인권침해는 고려사항이 아니었다. 민주화투사라고 자랑할 수 없는 치명적인 과오이다.

    당시 실제 표결에 참가한 외교관들은 국제사회에 대해 ‘양심의 가책과 인격적 수모를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고 들 회고한다.


    김석우 21세기국가발전연구원 원장 (북한인권시민연합 고문, 前통일원 차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