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검찰, 징역형 내리며 가해자 엄벌…장기적이고 안정적인 제도 정착 필요
  • ▲ 지난해 충북 청주시 오창읍에서 벌어진 ‘축사노예’ 사건을 계기로 보건복지부가 재가장애인 실태조사를 벌였다.ⓒ보건복지부
    ▲ 지난해 충북 청주시 오창읍에서 벌어진 ‘축사노예’ 사건을 계기로 보건복지부가 재가장애인 실태조사를 벌였다.ⓒ보건복지부

    무려 19년 동안 지적장애인을 무임금으로 부려먹고 학대한 축사 농장주의 부인이 징역 3년이라는 중형을 선고 받으며 그동안 우리 사회에 자행됐던 장애인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에 대한 무관심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지난해 충북 청주시 오창읍의 한 축사에서 도망치다가 발견된 40대 고모씨는 지적장애인 2급이다.

    고씨는 인근 옥산에 가족이 거주하고 있었지만 19년 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악독한 축사 주인 부부의 학대와 모멸에 시달리며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깊은 절망의 세월을 버텨왔다.

    가까스로 탈출을 시도해 경찰 조사과정에서 축사주인 부부의 악행이 세상에 알려졌고 이들 부부는 법원으로부터 징역 3년과 집행유예가 각각 내려졌다.

    특히 학대가 심했던 부인에게 검찰은 징역 7년을 구형하며 사회적 공분을 불러일으켰으며 재판부도 징역 3년이라는 중형을 선고하며 엄벌 의지를 나타냈다.

    그러나 이 같은 일이 벌어지는 동안 우리는 무엇하고 있었는지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보건복지부를 비롯해 충북도와 청주시 등 관계당국은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자 부랴부랴 장애인 전수조사에 들어가며 ‘인권’을 보호해야 한다고 허둥댔지만 고씨가 견뎌낸 세월의 무게에 비하면 한낱 새털 같은 조치에 불과했다.

    나약한 사회보장 시스템은 제쳐두고라도 사건이 벌어진 마을을 비롯한 지역 사회의 사람들은 또 무엇하고 있었던가.

    쉬운 말로 우리는 아무도 고씨에게 같은 사람으로서의 ‘우리’가 돼주지 못했다.

    아주 작은 관심만 있었어도 19년을 10년으로, 1년으로 줄일 수도 있었고 애초에 사건 자체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뒤늦게 후회해 본다.

    인간은 누구하나 완벽하지 않다. 그러므로 모두가 나름대로의 장애를 안고 있으며 수십억의 세계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만의 개성을 갖고 태어나 공동체를 이루고 한평생을 살아간다.

    조금 더 잘 나고 조금 더 부잣집에 태어나 경제적 편차에 속박돼 살아가기는 하지만 누구에게나 묘비명에는 ‘한 사람이 태어나 다시 돌아갔다’는 말 이외에 수식어가 필요 없다.

    수운 최제우의 동학에는 ‘유무상자’라는 공동체 사회제도가 있다.

    유무상자 제도는 가진 자가 조금 더 내고 많이 배운 자가 가르치며 노래나 춤을 추는 사람은 그 재능을 서로 기부하며 살아가는, 말 그대로 만민이 평등한 공동체를 이뤄 살아가는 제도다.

    불과 100여년전 봉건사회의 수탈을 이겨내고자 힘을 모은 백성들은 이러한 훌륭한 제도와 실천이 있었기에 근대사에 남을 시민운동인 ‘동학 혁명’의 업적을 남겼다.

    이는 엄청난 학습과 피 말리는 경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인간이 가진 순수한 마음들이 이뤄낸 고귀한 성과다.

    현행 교육제도는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고학력’의 시대를 만들고 있지만 지혜가 없는 몽매한 지식만 쌓아 피라미드식 사회구조의 꼭대기만 지향하며 아등바등 살고 있다. 한마디로 마음이 없다.

    수직적 사회 구조의 모순은 일제치하와 군부독재를 거치며 비롯된 시대의 서글픈 산물이지만 사회가 ‘그런 탓’으로 돌리기에 앞서 만연된 개인주의가 넘쳐 사회 구조를 병들게 하는 책임도 모두가 통감해야 한다.

    이번에 벌어진 고 씨의 눈물겨운 사연을 거울삼아 사람다운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지향해야 한다.

    정부를 비롯한 관계기관은 전시성 행정에서 벗어나 장기적 안목으로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제도를 만들어야 하고 ‘우리’는 주변을 한 번 더 돌아보고 생각하며 깊이 숨겨진 인간의 ‘본심’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인권이 보장된 좋은 세상은 너와 나, ‘우리’가 함께 보듬어 만들어 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