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김동섭 기자의 건보료 특집기사
  • ▲ 최종웅 소설가.ⓒ최종웅 작가
    ▲ 최종웅 소설가.ⓒ최종웅 작가


    최백수는 조선일보를 본다. 매일 아침 6시면 아파트 문을 열고 신문을 들고 들어와 읽기 시작한다. 그런데 오늘은 일요일이라서 신문이 오지 않는 날이다. 누워서 TV 뉴스를 귀로 듣고 있다가 벌떡 일어난다.

    할 일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며칠 전 신문을 읽다가 스크랩해 놓은 기사가 있다. 그 것을 자세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에서다 최백수는 여간해서 신문을 스크랩하지 않는다. 무슨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누구와 생존경쟁을 하는 처지도 아니다.

    그래서 매사를 대충 대충하는 버릇이 있다. 그게 습관이 되어버렸다. 며칠 전 조선일보를 보다가 눈이 번쩍 뜨였다. 신문 1면에 ‘실직‧퇴직하면 2~3배 오르는 이상한 건보료’ 라는 헤드라인이 눈길을 끌었다.

    바로 이거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노인들이 고통 받고 있는 문제이지만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생각에서 막막해 했던 사안이다. 자연 최백수의 눈길이 그 기사에 쏠릴 수밖에 없었다.

    실직이나 퇴직해서 월급이 없는데도 집과 차만 있으면 보험료가 2-3배 인상된다는 내용이 작은 제목으로 설명되어있다. 이 때문에 작년 한 해에만 민원 6, 700만 건이 쏟아졌다는 소제목에 이르러 서민들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를 실감한다.

    서민들이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건보로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6, 700만 건의 민원을 제기했으면 가히 아우성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최백수의 눈에 서민들이 살기위해 아우성치는 모습이 들어온다,

    ‘건보료 아우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실질소득 중심으로 부과체계 바꿔야!’ 라는 소제목에 이르러 그의 마음이 안도한다. 문제를 나열했으면 해결방안까지 제시하는 게 기사작성의 기초다.

    최백수는 신문을 읽다가 말고 두 눈을 감는다. 그의 눈에 늙어가는 서민의 초췌한 모습이 보인다. 어떤 사람이고 간에 나이가 들어서 실직이나 퇴직을 하면 생활에 위기를 맞게 된다.

    그렇다면 보험료도 낮아지는 게 상식이다. 국가란 바로 이렇게 위기를 맞는 노인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특히 건강보험이란 강자에게 많은 보험료를 징수해서 약자를 돕는 제도다.

    그게 상식이다. 문제는 대한민국 건강보험료는 그 반대라는 사실이다. 젊어서 직장에 다닌다는 뜻은 생활능력이 있다는 의미이고, 늙어서 실직이나 퇴직한다는 것은 노쇠해서 위기를 맞았다는 뜻이다.

    재산은 누구나 다 갖고 있는 것이다. 젊은 사람에게도 있는 것이고 늙은 사람에게도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살기위해서는 집이 있어야 하고, 출퇴근할 수 있는 차도 필요하다. 사람에 따라서는 논밭이 있을 수도 있고, 장사할 수 있는 점포가 있을 수도 있다.

    직장이 있을 때는 그 재산이 건강보험료를 내는데 아무런 근거가 되지 않다가 실직이나 퇴직하면 건강보험료를 부과하는 근거가 되어 월급을 받을 때보다 2-3배 올라간다는 것은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다.

    최백수도 평소에 이런 생각을 하고 살았다. 이런 문제가 신문이나 방송에 간혹 보도되긴 했지만 단편적이었다. 지나가는 비처럼 일시적이었다. 오늘처럼 대서특필된 것은 처음이다. 이렇게 심층적으로 보도한 것은 처음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조선일보 1면을 보고 있다.

    무엇보다 이 기사가 1면 톱으로 보도되어 파장이 만만치 않을 것이란 상상을 한다. 이 기사로 해서 희한한 건보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돌파구가 열릴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하면서 신문을 읽고 있다.

    조선일보가 어떤 신문인가?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메이저 언론이다. 충북이라는 지방에 살면서도 가는 곳마다 지방신문은 볼 수가 없지만 조중동은 흔히 볼 수 있다. 그게 바로 메이저 신문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눈에 뜨이는 게 바로 조선일보다. 이 뿐만도 아니다. 요즘은 TV까지 있다. 가히 신문재벌이라고 할 수 있다. 능히 정권을 창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정권을 타도 할 수도 있는 위력을 갖고 있다.

    그런 신문에서 1면 톱으로 기사를 내보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기사를 읽었을까? 그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았을까? 그 영향은 어떤 파장으로 현실화될까? 이런 상상을 하면서 최백수는 신문을 읽고 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