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드 배치 논란 계속되면 주한미군 철수론 일어날 것

    "우리의 아들 딸이 핵폭탄을 맞을지 모르는데
    자위적 조치도 못하게 하는 동맹국이 어디 있는가? 군대를 빼라"


    趙甲濟  


 삼국통일기에 신라가 唐의 식민지가 되지 않은 것은 金庾信으로 대표되는
자주국방의 의지 덕분이었다. 唐은 신라와 손잡고 백제, 고구려를 친 뒤
신라마저 식민지로 만들려고 했다.
이때 金庾信 등 지도부가 對唐결전을 결단한 덕분에 민족통일국가를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승부는 군인이 아니면 할 수 없다.
선비는 『최후의 일인까지 싸우자』는 말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원래 唐은 백제를 멸망시킨 직후 여세를 몰아 신라를 치려고 했다. 태종무열왕이 이를 알아차리고 신하들을 불러 대책을 의논했다. 多美公(다미공)이란 사람이 나와 이런 제안을 했다. 
   
   『우리 백성을 백제 사람으로 위장하여 도둑질을 하려는 것처럼 하면 唐의 사람들이 반드시 공격할 것입니다. 그때 더불어 싸우면 뜻을 얻을 수 있습니다.』 
   
   金庾信이 『그 말도 취할 만하니 따르십시오』라고 했다. 태종무열왕은 내키지 않았다. 
   
   『唐나라 군사가 우리의 적을 멸해 주었는데 도리어 함께 싸운다면 하늘이 우리를 도와주겠소.』 
   
   이에 金庾信이 말했다. 
   
   『개는 그 주인을 두려워하지만 주인이 그 다리를 밟으면 무는 법입니다. 어찌 어려움을 당하여 자신을 구하지 않겠습니까.』 
   
  • ▲ 김유신 장군상.
    ▲ 김유신 장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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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金庾信이 한 말은 삼국사기에 「自救」로 표현되어 있다. 신라가 개노릇을 하여 唐을 섬길 용의는 있다. 唐이 신라를 존중해 주면 말이다(이것이 자주적 사대주의의 정신이다).
    만약 唐이 크고 힘센 것만 믿고 신라의 자존심과 그 존재 자체를 말살하려 한다면
    신라는 唐을 물어뜯어서라도 自救를 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야말로 新羅와 같은 小國이 大國을 옆에 두고도 自我를 지켜갈 수 있게 한 정신무장의 핵심 논리이다. 
       
       신라가 臨戰태세를 갖추자 蘇定方(소정방)의 唐軍은 백제 포로들만 데리고 귀환했다. 당시는 唐의 전성기 고종시대였다. 고종은 『어찌하여 신라마저 치지 않았는가』라고 물었다. 소정방의 대답은 그대로 신라에 대한 세계 최강국의 최고 찬사이다. 
       
       『신라는 그 임금이 어질고 백성을 사랑하며 그 신하가 충성으로 나라를 섬기고, 아랫사람은 윗사람 모시기를 父兄 섬기듯 하니 비록 작지만 도모할 수가 없었습니다.』 
       
       (新羅其君仁而愛民 其臣忠以事國 下之人事其上如父兄 雖小不可謨也) 
       
       기록에 나오는 仁愛忠事. 즉 어짐, 사랑, 충성, 섬김, 이것이 신라의 공민 윤리였다는 것이다. 이런 공덕심은 21세기 대한민국에도 加減(가감) 없이 쓸모 있는 국가와 국민의 윤리이다. 국가와 지도층은 국민들을 어짐과 사랑으로 대하고, 국민은 국가에 충성하며 지도층을 섬긴다. 이것은 국민국가의 이상적인 「국가-국민」 관계이다. 화랑도의 武士道를 중심으로 한 신라의 국가윤리는 근대성을 지니고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근대성의 핵심은 자존심과 실용성이다. 金庾信의 직설적 말에서 그런 정신이 잘 묻어 나온다. 우리는 아무리 개처럼 작은 나라이지만 주인이 그 존재를 무시하면 사생결단하여 싸워서 지킬 만한 그 무엇이 있다. 그 무엇이야말로 아무리 힘센 것과도 맞바꿀 수 없는 나만의, 우리만의 自我이고 自尊인 것이다. 신라 지도층의 위대성은 이런 집단적 自我를 발견하고 이를 막대한 희생을 무릅쓰고 지켜내는 과정에서 민족적 自我로 확대 승화시켰다는 점이다. 여기서 종족을 민족으로 만든 동족의식이 생겨났던 것이다. 
       
       신라는 자주성을 지켜내는 방식에서 국력을 초과하는 무리를 하지 않았다.
    북한정권처럼 유아독존으로 모험을 하다가 必亡의 길을 걷는 바보짓을 하지 않았다.
    신라는 唐의 힘을 빌리고 그 唐의 패권을 인정하고 唐에게 감사하려고 했다.
    唐에 무모한 도전을 하지 않았다. 唐과 결전할 때도 외교적으로는 항상 유화책을 썼다.
    자존심을 뱃속에 숨겨 놓고 펼친 强穩 양면의 실용노선이 신라의 독립을 성취했다. 
  • ▲ 국산 미사일 시험발사를 참관한 박정희 대통령.
    ▲ 국산 미사일 시험발사를 참관한 박정희 대통령.
  •    자주국방이란 말을 신라 이후 처음으로 되살려낸 朴正熙의 다음 어록은
    金庾信과 같은 맥락이다. 
       
       <자주국방이란 것은 이렇게 비유해서 얘기를 하고 싶다.
    가령 자기 집에 불이 났다. 이랬을 때는 어떻게 하느냐.
    우선 그 집 식구들이 일차적으로 전부 총동원해서 불을 꺼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러는 동안에 이웃 사람들이 쫓아와서 도와주고 물도 퍼다가 주고,
    소방대가 쫓아와서 지원을 해 준다.
    그런데 자기 집에 불이 났는데, 그 집 식구들이 끌 생각은 안 하고
    이웃 사람들이 도와주는 것을 기다리고 앉았다면,
    소방대가 와서 기분이 나빠서 불을 안 꺼줄 것이다.
    왜 자기 집에 불이 났는데 멍청해 가지고 앉아 있느냐?
    자기 집에 난 불은 일차적으로 그 집 식구들을 총동원해 가지고 있는 힘을 다해서 꺼야 한다.> (1972년 1월11일 기자회견에서) 
       
     지금 한반도엔 핵위기라는 불이 났다.
    한국이 남의 집 불구경하듯 하니 미국이 답답하여 우선 주한미군을 지키겠다고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망)를 배치하려 한다.
    놀랍게도 한국 정부는 중국의 눈치를 보면서 선뜻 동의하지 않는다.
    이런 게 미국 언론과 여론에 제대로 알려지면
    '우리의 아들 딸이 핵폭탄을 맞을지 모르는데 자위적 조치도 못하게 하는 동맹국이 어디 있는가? 군대를 빼라'는 여론이 일어날지 모른다. 
  • ▲ 국산 미사일 시험발사를 참관한 박정희 대통령.
     사드 배치 논란은 일종의 美中 사이 중립론인데, 주한미군 철수론으로 이어질 위험성이 있다.
    이는 중국, 북한, 종북좌파 세력이 바라는 바일 것이다.
    한국이 중국과 미국, 북한과 미국 사이에서 중립을 취하려고 하면
    韓美동맹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런 中立化는 韓美동맹 해체를 겨냥한 말장난이다. 

      남북한의 좌파가 쓰는 '중립화'는 거의가 韓美동맹 해체라는 뜻을 포장한 糖衣錠(당의정)이다. 
     
     1980년 5월 계엄확대 조치로 정권을 잡은 신군부는 김대중씨를 연행, 그가 1973년에 在日북한공작원들과 함께 만든 反국가단체 韓民統 사건을 수사, 재판에서 死刑선고까지 받도록 하였다.
     有罪가 선고되는 데 핵심적 역할을 한 자료는 중앙정보부의 '金大中 연방제 판단 보고서'였다.
    그 요지는 이러했다.
  • ▲ 4.19후 소위 혁신세력의 남북협상 요구 데모.
    ▲ 4.19후 소위 혁신세력의 남북협상 요구 데모.
     <북괴의 ‘남북연방제’안은 4·19 직후인 1960년 8월 당시 我國의 불안한 정국과 국내 혁신 정당 및 학생층의 비등한 통일논의에 편승, 최초로 제의한 이래 현재까지도 그들의 핵심적 통일방안으로 활용되고 있는 것으로 북괴는 이를 통해 한반도 현상을 인정하는 듯한 공존 인상을 부각시켜 통일문제의 민족 내부화와 주한미군의 철수를 촉진시키고 한국內 각계각층 대중과의 광범한 통일 전선을 형성, 聯共 합작 여건을 조성하는 등 對南 폭력 적화혁명 기반을 강화하고자 적극 획책하고 있다. 
     이와 같은 북괴 연방제안과 金大中의 주장을 비교해 보면, 표현상 차이를 제외하고는 同 연방제안의 성격, 활동(기능) 및 기구 구성 면 등에서 쌍방이 일치하고 있다.  
    金大中의 연방제 통일주장은 북괴의 주장과 동일함은 물론 金大中도 이를 스스로 인정하고 있을 뿐 아니라 특히 연방제와 함께 '한반도의 外軍 철수'를 주장함으로써 同 연방제를 내세워
    주한미군 철수를 관철하려는 북괴의 전략적 기도에 영합하였다.
    북괴는 그의 이 같은 태도를 중시, 그를 '민주인사'로 규정하였고, '민주인사 집권時
    연방제로 통일을 실현한다'는 주장을 되풀이하는 가운데 '金大中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더라면
    평화적 통일이 실현되었을 것'(1975년 5월17일 金日成·日 마이니치신문 기자회견)이라고 피력하였다. 
     1973년 8월28일에는 '金大中 사건'을 들어 남북대화의 일방적 파탄을 선언(남북조절위 북측 공동위원장 김영주 성명)하는 등 그의 활동을 적극 비호한 바 있다.
    이로 볼 때 金大中은 북괴가 對南적화 전략 추진의 여건 조성책으로 제시해 온 '남북연방제'안에 사실상 동조함으로써 북괴를 고무시킴은 물론 나아가 주한미군 철수 주장으로 敵을 이롭게 한 것으로 평가된다.>
  • ▲ 4.19후 소위 혁신세력의 남북협상 요구 데모.
     김대중씨는 육군본부 계엄보통군법회의 검찰부 신문에서 '피의자는 한국에서 유엔군 등 外軍의 철수를 주장한 사실이 있나요'라고 묻자 이렇게 진술하였다. 
     '제가 外軍철수를 주장한 것은 남북간에 전쟁억제협정을 체결하고 미·소·일·중 4大國의 지원협력 결의 후 철수하라는 것이었지, 現시점에서 철수하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金大中씨가 일본에서 주도적으로 만든 韓民統의 1973년 8월13일자 발기문에는 '한반도를 중립화하고 남북연방제에 의한 점진적 통일을 실현한다'고 적혀 있다.
     1980년 金日成도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 방안 발표 연설에서
    '서로 다른 사상과 제도를 가지고 있는 북과 남의 두 지역을 하나의 연방국가로 통일하는 조건에서 고려민주연방공화국이 중립국가로 되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며 또 현실적으로 가장 합리적인 것입니다'고 밝혔다.

    중립국가가 된다는 것은 韓美 동맹 관계를 폐기, 주한미군을 철수시킨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金大中씨는 평민당 총재 시절인 1989년 6월3일 광주 교육대학의 시국 강연회에 참석하여
     '장차 이 나라가 통일이 되면 오스트리아식 영세중립국가로 가게 될 것으로 본다'고 밝힌 적이 있다. 김대중이 견지해온 연방제․중립국화․외군철수는 모두 주한미군 철수와 韓美동맹 해체를 전제로 하거나 목표로 하는 것이다.

     이런 김대중이 2000년 6월 김정일을 만나 비밀 합의한 것이 '주한미군의 평화유지군化에 의한 남북한 사이 중립화'였다. [조갑제닷컴=뉴데일리 특약]